<렛 미 인>(2008) 속 섬뜩함의 정체는 무엇인가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읽기 전 참고해주세요.
영화는 오스칼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돼지처럼 꿀꿀대 봐. 꿀꿀대 보라고." 그는 칼을 든다. 칼로 누군가를 위협하는 시늉을 하며 같은 대사를 반복한다. 몇 장면 지나지 않아 오스칼이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모습이 나온다. 코니라는 아이는 오스칼을 벽으로 몰아붙이고 그의 코 끝을 밀어 돼지 코처럼 만든다. "돼지처럼 꿀꿀대 봐." 코니는 말한다. 오프닝의 오스칼의 독백은 그가 평소에 많이 듣던 코니의 말을 그대로 반복한 것임이 드러난다. 그는 그렇게 억눌린 무언가를 표출하고 해소하려 애쓴다.
그의 그런 행동엔 분노뿐만 아니라 마초성을 향한 동경 또한 포함돼 있다. 오스칼은 12살이고 조금씩 남성성에 눈을 뜨는 시기를 지나고 있다. 학교의 또래 남자애들은 벌써 무리를 지어 서열을 나누고 자신의 남성성을 과시한다. 오스칼도 그러고 싶지만 그는 완력으로나 무리를 이끄는 카리스마로나 한참 부족하다. 그래서 그는 아무도 없는 자신의 방에서, 또는 공터의 나무를 상대로 자신의 남성성을 과시한다. 그가 살인 사건 기사를 스크랩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오스칼의 옆집에 뱀파이어 이엘리가 이사 온다. 놀이터 정글짐에서 처음 만난 둘은 오스칼의 루빅스 큐브를 주고받으며 조금씩 가까워진다. 어느 날 오스칼은 코니의 무리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마틴이라는 아이가 휘두른 막대기에 얼굴을 맞아 상처까지 입는다. 엄마가 상처에 대해 물었을 때 오스칼은 놀다가 넘어졌다고 둘러대지만 이엘리가 물었을 때 그는 사실대로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고 털어놓는다. 이엘리는 오스칼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한다. "맞으면 절대 가만히 있지 마. 너도 상대를 때려." 바로 다음 날, 오스칼은 체육시간이 끝나고 체육선생님에게 방과 후 체육활동에 참여하고 싶다고 한다. 맞받아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완력이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스케이트를 타러 호수에 갔을 때, 오스칼은 처음으로 코니를 때린다. 코니는 오스칼을 물에 빠뜨리려고 한다. 오스칼은 빨간색 막대기를 주워 들고 코니에 맞선다. 그 막대기는 이엘리의 보호자 호칸이 이엘리가 죽인 남자의 시체를 호수에 담그기 위해 썼던 막대기이다. 오스칼은 이엘리의 폭력을 뒷수습한 막대기를 힘껏 휘둘러 코니의 귀를 때린다. 그리고 등장하는 오스칼의 리액션 쇼트에서 그는 만족의 미소를 짓는다. 억눌렸던 욕구가 해소된 것 같은 해갈의 미소이다. 하지만 이 일을 계기로 코니의 무리는 무시무시한 대갚음을 계획한다.
"너는 누구니?"라고 묻는 오스칼에게 이엘리는 "나는 너야. 너도 누군가를 죽이고 싶지? 나는 살기 위해 죽여."라고 한다. 이엘리는 오스칼이 마음으로만 품는 폭력의 욕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그리고 오스칼과 다르게 이엘리는 폭력을 욕망한다기보다 삶을 욕망할 뿐이다. 모든 뱀파이어가 삶을 위해 살인을 택하진 않는다. 이엘리에게 물려 뱀파이어가 되는 이니아처럼 살인을 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뱀파이어도 있다. 만약 이니아의 선택이 영화에 나오지 않았다면 이엘리에게 살인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니아의 선택이 영화에 나옴으로써 이엘리의 선택은 윤리적 판단 앞에 놓인다. 그의 살인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잠시만 내가 되어줘."라는 이엘리의 대사를 들었을 때 우리는 조금은 주저하게 된다. 오스칼은 이엘리가 되기를 선택한다.
이엘리가 라케를 죽일 때 그 모습을 지켜본 오스칼은 자신의 손에 든 주머니칼을 떨어뜨린다. 그 칼은 영화 오프닝 때부터 줄곳 오스칼과 함께하며 그의 억눌린 폭력성을 표출하는 데 사용됐다. 막상 그는 폭력의 위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폭력, 즉, 살인을 눈앞에서 목격했을 때 공포에 질려 칼을 내려놓는다. 공포에 떨고 있는 오스칼 뒤로 이엘리가 입에 피를 묻히고 다가와 그를 안는다. 그리고 말없이 키스를 한다. 키스하는 장면은 이엘리와 오스칼 각각을 오버 더 숄더 쇼트(over the shoulder shot)로 찍어 쇼트-리버스쇼트(shot-reverse shot)로 번갈아 편집했는데 두 쇼트를 비교해 보면 영화가 오스칼 보다 이엘리와 내밀히 소통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선 쇼트 사이즈를 비교해 보면 이엘리를 오스칼보다 더 크게 찍었다. 굳이 나누자면 이엘리는 클로즈업 쇼트로 찍었지만 오스칼은 미디엄 클로즈업으로 찍었다. 또 이엘리는 키스할 때 눈을 뜨고 오스칼의 표정을 살핀다. 그리고 카메라는 그런 이엘리의 눈동자에 초점을 맞춘다. 반면 오스칼은 눈을 감고 표정 변화 없이 키스를 한다. 심지어 그의 얼굴 위에 살짝 그림자가 드리워져 관객은 그와 동일시가 힘들다. 왜 그렇게 찍었느냐. 이엘리가 오스칼을 속이고 있기 때문이다. 어른이 아이를 속이는 건 얼마나 쉬운 일인가. 이엘리는 12살이지만 아주 긴 시간을 12살로 살았고 오스칼은 정말 12년만 살았다. 이엘리는 오스칼이 자신을 사랑해주길 바라고 그래서 그를 속인다. 자신에게 이니아의 선택 같은 다른 선택지가 있음을 말하지 않고 자신의 살인을 정당화한다.
이엘리는 오스칼을 떠나고 오스칼은 수영장에서 코니의 무리와 코니의 형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코니의 형은 남성성의 위계 가장 위에 있는 인물로 오스칼에게 극복할 수 없는 위협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이번 장난은 전보다 지나치다. "3분 동안 물속에 들어가 있으면 얼굴에 상처만 낼게. 3분을 못 참으면 눈알 하나를 파 버릴 거야. 귀에는 눈. 알겠지?" 코니의 형은 말한다. 귀에는 눈. 익숙한 논법이다. "상대가 너를 때리면 가만히 있지 말고 맞받아쳐." 이엘리는 오스칼에게 말했다. 오스칼은 코니를 때림으로써 이엘리의 말을 실천했고 그 결과 코니의 형에게 대갚음당할 위기에 놓인다. 그때 폭력의 위계 최상위에 있는 이엘리가 나타나 오스칼을 구원한다. 하지만 그게 구원일까. 오스칼은 이후 이엘리와 함께 기차를 타고 어딘가로 떠난다. 오스칼은 이엘리의 살인을 계속 지켜봐야 할 것이고 추측컨데 어느 순간이 되면 호칸처럼 이엘리 대신 피를 구하러 다닐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상당히 섬뜩한 결말이라고 할 수 있지만 영화는 그걸 아름답게 그린다. 둘은 상자를 두드리며 모스부호로 속삭임을 주고받는다. 아름다우면서도 섬뜩한 장면이다. 그리고 그게 이 영화의 매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