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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우 May 10. 2020

언박싱

강현우 드림

 시작은 상자 뚜껑을 여는 일이다. 어떤 상자인지 열어보기 전까지 모른다. 달착지근한 초콜릿 한 조각이 들어있을 수도 있고 비둘기 한 마리가 눈을 맞추며 튀어나올 수도 있다. 비둘기가 나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상자를 열지 못한다면 그 안의 모습은 결코 알 수 없다.


 1987년 가을 나의 손에 첫 상자가 쥐어졌다. 첫 상자는 새끼손톱만큼이나 작았다. 두려움의 존재가 들어있을 수 없을 만큼 작았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나는 쉽게 뚜껑을 열 수 있었다. 옹알이를 시작했고 걸음마를 시작했다. 어머니의 젖을 물고 아버지의 품에 안긴 채 조금 더 큰 상자를 열고 그보다 조금 더 큰 상자를 열어 나갔다.


 상자는 해가 거듭 될수록 눈에 띄게 커졌다. 상자가 커질수록 그 안에 들어있을 존재 또한 몸집을 불려 갔다.

그렇게 시작은 늘 나를 따라다녔다. 떨어진 연필을 주워주며 환하게 웃어주던 친구에게 사랑 비슷한 감정을 시작했고 그 아이를 괴롭히는 반 친구를 미워했다. 하고 싶은 것만 하던 어린 내가 하기 싫어도 때로는 삼키며 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는 걸 알아버린 순간, 내가 한 모든 일의 책임은 누군가의 것이 아닌 내 것이라는 걸 깨달아 버린 그때 더 이상 손바닥 위에 올릴 수 없을 만큼 커져버린 상자가 내 옆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오랫동안 열지 못하고 있던 상자를 열기로 결심했다. 30살의 여름이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편도행 티켓을 끊었다. 돌아올 때가 되면 돌아오겠다는 심보였다. 의식주를 20리터짜리 가방에 쑤셔 담았다. 갈아입을 수 있는 여벌의 옷과 잠자리가 되어 줄 텐트와 침낭 그리고 배를 채워 줄 색연필 한 통. 계획은 간단했다. 옷과 집은 가방에 있으니 그림을 그리고 팔아서 끼니만 해결해보자는 생각이었다. 호기롭게 독일을 걷기 시작했다. 햄버거 가게가 보이면 아침에만 판다는 맥모닝 다섯 개를 사 가방에 쑤셔 넣고 해가 질 때까지 걸었다. 배가 고플 때면 햄버거 하나를 먹고 2리터짜리 생수를 통째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해가 땅에 가까워질 때쯤이면 잘 곳을 찾아 헤맸다. 인적이 드물고 땅이 마른 곳을 찾아 텐트를 치고 등을 눕혔다. 그렇게 45일을 걸었다. 100만 원의 비상금은 아낀다고 아꼈지만 곧 바닥을 드러냈다. 비상금이 떨어지기 전까지 그림을 팔아보겠다는 야심 찬 계획은 우기였던 독일의 날씨만큼이나 점점 흐려졌다. 취미로 그릴 땐 편하고 즐거웠던 그림이 '팔아야 해.'라는 마음을 가지는 순간 불편하고 어려워졌다. 그렇게 그림 한 장 제대로 그리지 못한 채 독일을 지나 프라하로 향했다.

 

 비가 막 그친 프라하의 하늘은 맑은 소리가 났다. 그간의 때를 벗겨내고 싶어 가장 저렴한 호스텔을 찾아 들어갔다. 7유로를 결제하고 12개의 침대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냄새가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씻고 나와 짐을 정리했다. 배낭은 침대 옆 캐비닛에 넣고 비밀번호를 걸었다. 지갑과 핸드폰 색연필을 챙긴 보조 가방을 메고 도망치듯 호스텔을 빠져나왔다. 오랜만에 가벼워진 등이 마음을 한결 가볍게 만들었다. 카렐교(Charles Bridge)를 지나 구시가지 광장(Old Town Square)으로 향했다. 구시가지 광장 언저리에 앉아 색연필을 들었다. 가벼워진 가방 때문일까 적당히 내려놓은 마음 때문일까. 색연필의 무게가 조금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그러자 마법 같은 일이 내게 벌어졌다.


 광장 가운데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내게 사람들이 하나 둘 다가왔다. 그중 먼저 말을 건넨 건 쌍둥이 형제였다. 자신들을 그려 줄 수 있냐는 부탁에 흔쾌히 그림을 그려 선물했다. 그들은 차고 있던 팔찌를 풀러 색연필 통에 넣고 떠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러시아 가족이 다가와 아이를 그려달라 부탁했고 올린 머리를 수줍게 만지며 앉아 있는 아이를 그렸다. 고맙다며 막대사탕을 건네던 아이의 모습은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잊지 못한다. 사람들과 섞여 정신없이 그림을 그리다 보니 어느새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색연필 통엔 약간의 돈과 팔찌 그리고 막대사탕이 담겨 있었다.

그림 여행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시작은 상자 뚜껑을 여는 일과 같다. 상자를 여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상자엔 비밀번호도 자물쇠도 달려있지 않다. 그저 두 손으로 힘껏 상자 뚜껑을 열면 된다. 

그 안에 어떤 것이 들어있을지는 열어보기 전까지 모르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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