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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우 Dec 13. 2019

9,288km 위의 마음들 #1

강현우 드림

긴밤 끝에, 그리고 손 끝에.

밤이 길어졌다. 폴란드 크라쿠프(Krakow)의 광장은 크리스마스 마켓 준비로 분주했다. 여행길 위에 올라 맞이한 두 번째 크리스마스였다. 거리에선 캐럴이 울리고 있었고 사람들의 손엔 그쟈니에츠(Grzaniec)가 한 잔씩 들려 있었다. 그쟈니에츠는 와인에 계피와 과일들을 넣고 함께 끓여 따듯하게 마시는 겨울철 음료다.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그쟈니에츠를 한 잔 사 들었다. 계피 향이 나는 따뜻한 와인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 온몸에 퍼져 추위를 잠시 잊게 해줬다. 캐럴 사이로 레너드 코헨의 <Hallelujah>가 들려왔다. 노래가 들리는 쪽으로 걸어가니 손가락 열 마디를 빼곤 온몸을 꽁꽁 싸맨 남자가 눈을 맞으며 거리공연을 하고 있었다. 할렐루야를 부르던 사내의 손가락은 짙게 붉어져 와인색과 비슷했다. 공연이 끝나갈 때쯤 다 식어버린 와인 한 모금을 입에 털어 넣었다. 술기운이 천천히 올라왔다. 기타를 내려치던 남자는 마지막 곡을 마치고 관객들을 향해 감사 인사를 건넸다. 나는 박수와 함께 그쟈니에츠 한 잔 값인 10즈워티를 기타 가방에 살포시 넣었다. 그의 기타 가방엔 관객들의 감사와 응원이 눈처럼 수북이 쌓여 있었다.

할렐루야를 흥얼거리며 숙소로 돌아왔다. 마침 숙소로 들어오는 다른 사람들과 마주쳤다. 그들의 붉어진 두 볼엔 추위가 가득 담겨 있었다. 외투를 벗어 의자에 걸쳐놓고 주방으로 향했다. 누군가 내려놓은 커피를 컵에 따라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커피는 일박에 7천 원 하는 호스텔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서비스 중 하나였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커피를 한 잔씩 손에 들고 공용 테이블로 모였다. '여행'이라는 공통 주제가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대화가 시작됐다. 덕분에 어색했던 테이블의 분위기는 얼었던 몸이 녹듯 서서히 부드러워졌다. 여러 여행 이야기가 오갔지만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한 여성의 '시베리아 횡단열차' 탑승기였다. 기차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며칠 동안 열차 안에서 의식주를 해결해야 한단다. 누구는 혀를 찰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나는 그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모임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다. 10인실 2층 침대. 조용히 몸을 눕혔다. 기절하듯 잠든 손 끝에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핸드폰 화면 검색창에는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적혀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열차에 오르는 꿈을 꿨다.


꿈속의 열차
시베리아 횡단열차

시베리아 횡단열차(Trans-Siberian Railway)는 러시아 모스크바(Moscow)부터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를 잇는 시베리아 횡단 노선을 달리는 열차다. 9,288km에 달하는 노선을 7일 동안 달린다. 중간중간 수많은 역을 지나치지만 어디에 내릴지는 탑승자에게 달렸다. 7일간 달리는 기차라. 사랑하는 이를 만나기 위해 달려가는 누군가에게는 7일의 기다림이 설렘을 키워 줄 것이고, 세상의 무게가 버거워 어딘가에 숨고 싶은 사람에게는 좋은 동굴이 되어 줄 것 같았다. 고독을 원하는 사람에겐 흔적 없는 7일이 되어줄 것 같았다. 상상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낭만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Petersburg)를 지나 열차의 출발역인 모스크바로 향했다. 기차를 타러 가는 길이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안에서 그토록 상상하던 나의 낭만을 찾을 수 있을까.

모스크바의 밤은 짙었다. 날 선 바람이 불었다. 사람들은 쓰고 있던 모자를 푹 눌러쓰고, 주머니 깊숙이 손을 찔러 넣었다. 달 빛 아래 모여 탑승 절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지나 3등석이 있는 곳까지 걸었다. 길게 뻗은 기차는 모두 같은 모양의 창이 나 있었지만, 창 안쪽의 모습은 달랐다. 어떤 창의 안쪽에는 레이스 달린 커튼이 보였고 그사이에 화병 하나가 놓여 있었다. 꾸밈새를 보아하니 1등석이다. 1등석 '룩스'는 2인이 지낼 수 있는 밀폐형 객실이다. 조금 더 걸었다. 칸이 바뀌자 커튼의 무늬는 조금 단조로워졌다. 화병도 보이지 않았다. 앞에서 본 객실보다 한 층 단순해진 객실은 아마도 2등석 '꾸페'. 내가 탑승하는 3등석 '플라츠카르타'는 6개의 침대가 개방형으로 구성돼 있었다. 열차 한 칸에 54개의 침대가 서로를 바라보며 빼곡히 들어가 있는 모습이다. 플라츠카르타 입구에 다다르자 나이가 꽤 있어 보이는 금발의 승무원이 검표 준비를 하고 있었다. 탑승이 시작됐다. 달빛 아래 춤추던 숨들이 하나둘 열차 안으로 사라졌다.

승객들은 어둠 속에서 묵묵히 이불 홑청을 씌우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들어온 모습 그대로 신발도 벗지 않은 채 모포를 얼굴까지 끌어 덮고 바로 잠을 청하기도 했다. 표를 한 번 더 확인하고 내 자리로 갔다. 자리 위엔 이불로 쓸 모포 한 장과 돌돌 말린 매트리스와 베개가 있었다. 그 위로 잘 세탁된 커버가 개어져 있었다. 커튼 대신 블라인드가 달린 창문에 눈이 갔다. 내 앞자리엔 먼저 도착한 콧수염이 멋지게 난 남자가 능숙하게 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가죽으로 된 의자 위에 커버를 씌운 매트리스와 모포 베개를 올려놓으니 제법 그럴싸한 침대가 완성됐다. 몸을 눕히고 시계를 확인하니 새벽 2시. 조용한 열차 안에는 이불을 부스럭거리며 편한 자세를 찾는 소리가 전부였다. 표에 적혀있는 출발 시각이 오자 열차가 덜컹-하며 출발할 준비를 한다. 이내 열차가 움직였다. 드디어 나의 낭만이 출발하고 있었다.


달 아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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