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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우 Dec 19. 2019

9,288km 위의 마음들 #2

강현우 드림


포근한 아침의 소리엔 말이 없다.

 '달그락' 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열차는 여전히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창밖에는 하얀 눈과 길게 뻗은 나무들이 쉴 새 없이 지나고 있었다. 아침 햇살이 침대 위로 드리웠다. 나는 햇빛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해 눈을 살짝 찌푸렸다. 반쯤 감긴 눈으로 풍경을 쫓고 있는데 다시 한번 소리가 났다.

달그락-

소리가 나는 쪽으로 눈을 돌렸다. 앞에 앉은 남자가 컵을 휘휘 젓고 있었다. 윗입술을 완전히 가린 콧수염 때문에 그 모습이 사뭇 신중하고 진지해 보였다. 컵에 집중하던 남자는 나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내게 눈길을 돌렸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짧게 인사를 건네고 그가 들고 있는 컵을 바라봤다. 남자는 컵을 한번 보여주더니, 뭔지 모를 러시아 말과 함께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컵을 받기 위해선 저쪽으로 가라는 의미 같았다. 나는 남자가 가리키는 열차 반대편으로 걸었다.

복도는 사람 한 명이 간신히 지나갈 정도로 좁았다. 54개의 침대가 개방형으로 되어있던 덕분에 걸어가는 내내 침대 밖으로 튀어나온 발과 머리를 요리조리 피해 가며 걸어야 했다. 열차 칸 끝쪽에 다다르자 몇몇 사람들이 같은 모양의 컵에 물을 뜨고 있었다. 온수기 옆으로 지난밤 내 여권을 검사했던 차장 방이 있었다. 차장은 안경을 내려쓴 채 테이블 위에 올려진 종이에 무언가 적고 있었다. 그녀 옆엔 주전부리가 잘 정돈돼 쌓여있었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금액을 내면 구매가 가능한 것들이었다. 차장은 볼일이 끝났는지 펜 뚜껑을 닫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제야 나를 보며 무슨 일로 왔냐는 표정을 지었다. 짧게 인사를 건네고 물을 뜨고 있는 여성 손에 들린 컵을 가리켰다. 차장은 오케이 사인과 함께 찬장에서 컵과 스푼을 꺼내 내게 건넸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컵

"스파시보." 러시아 말로 고맙다고 얘기하자 무표정이었던 차장의 얼굴 위로 작은 미소가 피었다. 다시 좁은 복도를 지나 자리로 돌아왔다. 앞자리 남자에게 컵을 보여주며 미션을 성공했다는 듯 자랑스러운 표정을 짓자 그는 엄지손가락을 올렸다. 가방을 열어 챙겨 왔던 커피를 뜯었다. 뜨거운 물을 뜨기 위해 다시 한번 복도를 오갔다. 커피 한 잔을 타기 위한 여정이 제법 길었지만, 문제가 될 건 없었다. 창밖의 자작나무 숲은 어느새 낮게 지어진 건물들로 바뀌어 있었다. 그사이 나는 비효율적으로 타온 커피를 침대 앞 테이블 위에 올렸다. 눈곱도 떼지 않은 채 커피 한 모금을 삼켰다. 따뜻한 커피가 들어와 잠으로 얼어있던 몸을 깨웠다.

꼬르륵- 소리에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배가 고팠는지 챙겨온 음식들을 주섬주섬 꺼내 먹기 시작했다. 건너편 남자는 신문지에 둘둘 말아온 빵을 꺼내 칼로 썰어 정체 모를 잼을 듬뿍 발라 한입 가득 물고 있었다. 콧수염 아저씨는 음식 보따리에서 팔뚝만 한 햄과 절인 생선 그리고 빵을 꺼내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었다. 가장 많이 먹고 있는 음식은 뜨거운 물을 이용하는 용기 음식들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좋은 건 한국 라면인 '도시락' 이었다. 러시아에 한류 열풍이 불고 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이렇게 직접 마주하니 괜히 반가웠다. 식사가 끝나고 사람들은 방앗간을 찾는 참새 떼처럼 컵을 챙겨 온수기로 향했다. '다들 뭘 마시는 걸까?' 나의 질문에 홍차 향이 대답을 대신했다. 러시아에서 '쵸르니 차이(Black Tea)'는 가장 대중적이고 인기 있는 차라고 한다. 차로 입가심까지 마친 사람들은 다시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북적거렸던 아침은 이내 고요해졌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볕은 낮잠을 청하는 사람들 위로 설탕처럼 달콤하게 내리고 있었다. 횡단 열차의 아침은 겨울이 무색할 정도로 포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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