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덕 Aug 21. 2020

나는 은하수를 보고 싶어서

청송의 여름밤


  “은하수가 어디 있다는 거야?”

  두리번거리던 Y가 내게 물었다. 아니, Y였는지 M이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확실한 건, 우리 넷은 취했다. 술기운에 뺨이 달아올랐고, 얼굴을 감싸는 공기가 선선했다. 밤하늘이 짙었다. 반달이 떴어도 별이 제법 많이 보였다.  


   “저기 있네”

  펜션 주인 S가 손가락으로 하늘에 길을 그렸다. 가리키는 곳을 보고 있으려니 희뿌연 뭔가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은하수라기엔 초라했다. 옅게 낀 구름 같기도 하고, 검은 옷에 말라붙은 막걸리 자국 같기도 했다. 촌스러운 음악 몇 곡이 하늘로 흩어지는 동안, 우리는 은하수다운 은하수가 모습을 드러내길 기다렸다. 하지만, 여전히 흰 기운은 초라했고 목은 뻐근하여 M과 Y는 고개를 내려 리트리버들을 쓰다듬었다. 나는 계속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산책 나가자고 말한 게 나인지 S인지 기억이 흐릿하다. 바로 자기에는 속이 더부룩했다. 이베리코 꽃삼겹이며 토마호크며 펜션을 리뉴얼하며 새로 개발한 무한리필 풀코스를 잔뜩 먹은 탓이었다. 우리는 부른 배를 두드리며 개들을 만지다 노래를 듣다가 초점 없는 눈으로 하늘이나 바라보던 참이었다. 움직여야 했다. 은하수를 더 진하게 보고 싶거나, 몸에 감기는 밤공기를 더 즐기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스피커를 끄고 산책을 나서자, 크고 작은 개 4마리도 따라나섰다. 

  펜션 뒷길은 고요했다. 펜션은 청송에서도 외따로 떨어진 동산에 홀로 있었다. 달빛이 흙길을 비췄고, 달빛을 밟으면 흙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개들은 수풀 안쪽으로 들어가 버스럭 소리를 냈다. 소리를 듣자 하니, 신이 나서 무언가를 쫓는 듯했다. 개의 소리를 따라 눈을 움직이니, 희미한 별빛 같은 게 보였다. 반딧불이였다. 

  깊이 들어가자 어둠이 더 짙었다. 아래로는 반딧불이가 더 진했고, 위로는 별이 더 진했다. 우리 넷은 가만히 서서 다시 하늘을 보았다. 별자리 어플에서 알려준 대로, 이등변 삼각형 형태의 별 네 개를 찾았다. 백조자리였다. 백조자리를 따라 쭉 내려오면 뱀주인자리, 그리고 전갈자리. 별자리를 따라 위치를 가늠하고서, 멍하니 쳐다보며 은하수가 진해지길 기다렸다. 한참을 보아도 은하수는 여전히 흐릿했다. 보이는 것은 없고, 내 느낌만 짙었다. 내 안쪽으로 술기운의 따스함과, 내 바깥쪽으로 밤공기의 청량함. 어둠 속에 둥실둥실 떠있는 느낌. 청송의 여름밤이었다.


  우리는 펜션으로 돌아와, 다시 노래를 들으며 별것 없는 이야기들을 흘려보냈다. 고개를 드니, 펜션의 빛 때문에 별이 많이 숨었다. 나는 못내 아쉬워 다시 산책을 다녀오려 일어섰다. 덩치 큰 리트리버들은 충분히 놀았는지 배를 뒤집어 누웠고, 작은 개 한 마리만 쭐래쭐래 따라왔다. 

  혼자 시골길을 걸으니 유난히 캄캄했다. 술이 조금 깨서 캄캄한지, 캄캄해서 술이 깨는지 모를 일이다. '개가 에스코트해주니 괜찮다.'고 생각하며 나는 어둠을 향해 걸었다. 

  어느 순간부터 내 발걸음 소리만 들렸다. 개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등골이 싸늘하여 뒤를 돌아보자, 개가 없었다. 개는 저 멀리 펜션 주차장의 가로등 빛 아래에서 물끄러미 앉아있었다. '난 못가. 무서워.'라고 말하는 듯했다. 배신감을 느끼며, 나는 더 짙은 어둠을 향해 걸었다.

  혼자 가니 별이 더 잘 보였고, 어둠도 더 잘 보였다. 한 발짝 한 발짝 내딛자, 내 발걸음 소리와 함께 바스락 소리가 들려왔다. 풀숲에서 뭔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조금 더 가서 얕은 고개 하나만 넘으면 펜션이 가려져 더 캄캄할 텐데. 이대로 조금만 더 걸어가면 은하수가 잘 보일 법도 한데. 나는 어릴 적 봤던 공포영화를 떠올리고 말았다. 시골에 놀러 간 친구들. 그중 한 명의 객기. 그리고 비명. 피가 철철. 

  고개를 넘을 수도 없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고, 어둠 속에서는 낯선 소리들이 울려대서, 나는 한참을 서성대다, 돌아왔다. 발걸음이 빨랐다. 작은 개는 여전히 가로등의 영역에서 쪼그려 앉아 있었다. 고마워해야 할지, 비겁하다 해야 할지.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펜션으로 들어섰다. 나를 따라 개가 펜션 안마당으로 들어왔다.

  친구들은 여전히 다른 개들을 쓰다듬고 있었다. 나는 무서웠노라고 그들에게 징징댔다. 그들은 피식 웃고서 다시 별 것 없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밝은 곳에는 사람과 개가 있고, 어두운 곳에는 별과 반딧불이가 있었다. 여름의 시작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이유의 숨소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