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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덕 Oct 28. 2020

지금 이 순간, 고양이의 감촉


꽃비의 사진을 찍는다. 9살. 코리안 숏헤어. 치즈태비. 찰칵찰칵 찍는다. 예뻐 보여서 핸드폰을 들면, 녀석은 자세를 망가뜨린다. 못나면 못난대로 사진을 찍는다. 늘어진 뱃가죽. 짧은 다리. 둥근 어깨. 녀석은 나를 보며 시큰둥하거나 방해하거나 한다. 나는 계속 사진을 찍는다. 하품하는 입. 입가 주변에 누런 털. 분홍입술 위에 검은 반점. 살짝 깨진 왼쪽 어금니, 살짝 잘린 혀끝. 


꽃비는 고양이 나이로 슬슬 노인이다. 남겨질 나를 위해 찰칵찰칵 사진을 찍는다. 찍은 사진들을 들춰본다. 답십리 유기동물센터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사진이 보인다. 그때에 비해 살이 쪘고 몸이 둔해졌다. 그때는 낚싯대를 흔들면 집의 남쪽부터 북쪽까지 굉음을 내며 횡단하였다. 지금은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구미에 맞게 휘휘 저어줘야 앞발을 까딱거린다. 그때는 닭가슴살도 잘 먹고 트릿도 오독오독 씹어먹었으나 지금은 가쓰오맛 츄르만 먹는다. 몇 주 전 건강검진 결과가 좋아 다행일 따름이다.


앞으로 몇 번이나 함께 가을밤을 맞이할지 모를 일이다. 꽃비가 떠나면, 나는 다소 울고 이내 익숙해질 것이다. 아니, 익숙해질지는 모르겠다. 다만, 사진을 꺼내보면 다시 눈물이 날 것이다. 그 눈물길을 위해 사진을 찍는다. 그때 펑펑 울 수 있게. 상실감이 흘러나올 길을 만들어 주게.


다시 찰칵찰칵 사진을 찍는다. 사진으로 남지 않을 것을 생각한다. 5.2kg의 무게감. 털의 부들부들함. 어금니의 따끔함. 몸의 따뜻함. 가르랑거릴 때 목의 진동. 글을 쓰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사진이나 영상으로 남지 않는 것들을 기록하려 쓴다.

불을 끄고 침대에 몸을 뉘이면 꽃비는 쪼르르 침대 위로 올라온다. 이불 밖의 내 손을 깨물다가, 내 손바닥을 향해 머리를 들이민다. 머리와 목덜미를 쓰다듬으면 가르랑대다 다시 손을 강하게 문다. 그러면 나는 토라진 척 몸을 돌린다.(가끔은 많이 아파 정말 토라지기도 한다) 꽃비도 몸을 돌린다. 침대 한 귀퉁이에서 몸을 둥글게 감는다. 나는 등을 돌린 채 핸드폰을 보다가 슬그머니 팔이나 다리를 꽃비에게 갖다 댄다. 온기가 닿으면 꽃비는 다시 가르랑거린다. 9년째 같이 생활하며 자연스레 굳어진 순서다.

정말 잘 때가 되어 몸을 바로하고 이불을 당겨 올리면 녀석은 이불 위로 올라가 내 무릎 사이에 자리잡는다. 몇 분 쯤 지나고 내 숨이 고르게 움직이면, 녀석은 침대에서 내려가 제 자리에서 턱을 괴고 눈을 감는다. 마치 나를 재운 후 제 잠을 자려는 듯이. 이 또한 정해진 순서대로다.


꽃비가 없을 밤을 생각한다. 어두운 밤. 가위에 눌리는 밤. 텅 빈 밤. 꽃비가 없었을 적의 밤. 나는 무서워진다. 다시 눈을 떠 꽃비가 있는 곳을 바라본다. 따뜻하고 말캉거리는 존재가 희미하게 잠을 잔다. 사진의 밝기를 최대로 올려 사진을 찍어본다. 찰칵. 꽃비의 모습 대신 어둠만 찍힌다. 사진 소리에 꽃비는 눈을 떴다 다시 눈을 감는다. 나도 눈을 감는다. 

다시 생각한다. 지금의 꽃비만 생각하자. 가르랑 가르랑 소리와 털의 감촉과 칭얼칭얼 잠투정. 느릿느릿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과 배. 그 안에 담긴 작은 심장. 코끝에 살금 손가락을 대보면 옅은 들숨과 날숨. 꽃비가 가끔 내 무릎을 베고 낮잠 잘 적이면, 그 일정한 숨이 느껴졌다. 지금 제 자리에서 자는 꽃비가 그러할 것이다.

자자. 느릿느릿 숨을 쉬자. 꿈 같은 거 꾸지 말자. 나도 꽃비도 잘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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