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마침 텐동을 떠올린 나에게 감탄한다.
세상에, 이렇게 적절한 메뉴를 생각해내다니. 덕아 대단해.
나는 나의 기억력을 대견해하며 식당으로 향한다. 발걸음이 사뿐하다.
텐동 한 그릇에 설렌 까닭은, 코로나 19 때문이었다. 며칠째 집밥만 먹고 있었다. 김치찌개를 한솥 끓여 이틀을 먹고, 카레를 끓여 사흘을 먹었다. 회사상사는 재택근무를 마뜩지 않아하는 눈치를 풀풀 풍겼고, 나는 급한 업무 전화를 대응 못할까봐 밖에 나가기를 꺼렸다. 하지만, 김치찌개로 네 끼, 카레로 다섯 끼, 만두라면, 스팸라면, 참치라면, 그리고 계란간장밥까지 오자, 생각했다. 안 되겠다. 저녁은 나가서 먹자.
저녁 무렵 하늘은 흐렸고 햇볕은 힘이 없었다. 동네 식당 몇 군데를 돌았으나 사람이 바글바글하여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마지막 대안인 김밥천국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내 인생이 늘 그렇지 뭐. 하고 감정이 바닥으로 가라앉는 찰나, 텐동집이 떠올랐다. 언젠가 산책을 하다 마주친 가게였다. 집에서 걸어서 15분쯤 거리. 맛집이라는 확신이 오는 외관. 나른한 주말에 산책하며 들르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가게. 정말이지 적절했다.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 정확히는 공기를 받아들이는 내 기분이 달라졌다.
사뿐사뿐 걸으며 상상한다. 텐동은 어떤 맛일까. 일본식 튀김이니, 씹으면 가볍게 부스러지려나. 밥은 돈부리 아래 깔린 밥 느낌일까. 온천계란은 수란이랑 비슷할까. 내가 알고 있는 맛들을 조합하여 가늠해본다. 인생 첫 텐동이다. 소개팅 나가며 어떤 사람일지 상상하는 기분이다. 거기에서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빼고, 온전히 설렘만 있다.
식당은 네 평 남짓하다. 바에 사람들이 띄엄띄엄 앉아있고, 요리사가 바 안쪽에서 재료를 튀긴다. 나는 아나고 텐동을 시키고 구석에 다소곳이 앉는다. 경건한 마음으로, 지글지글 기름에 튀김 끓는 소리를 듣는다. 소리가 아름답다. 맥주를 시킨다. 생맥주로 목을 축이며 봄비 같은 기름 소리를 감상한다.
요리사는 능숙하게 한 그릇을 완성하여 바 너머로 건넨다. 인터넷에 검색해본대로 앞접시에 튀김을 덜어낸다. 계란을 터뜨려 밥과 함께 한 숟갈 뜬다. 온천계란의 부드럽고 고소한 맛이 밥에 밴 짭조름한 양념과 어우러진다. 튀김을 하나 집는다. 가볍게 베어 무니 겉은 스르르 바스러지고 붕장어의 부드러운 속살이 씹힌다. 야채튀김을 먹는다. 역시나 튀김은 가볍고, 속의 야채는 부드럽다. 김 튀김은 정말 튀김이다. 김은 튀겨지며 제 연약함을 잃고, 튀김과 한 몸인 듯 바삭하게 부서진다. 씹으며 느껴지는 김의 향으로 그것이 원래 김이었음을 겨우 느낀다. 맥주를 한 모금 마신다. 쌉싸름한 청량감이 느끼함을 잡아준다. 다시 튀김을 집어먹고, 밥과 계란을 비빈다.
맛있다. 아주 맛있다 할 정도는 아니지만, 충분히 맛있다. 수일째 익숙한 맛만 느끼다가, 낯선 맛을 느낄 때의 간극. 그 지점이 그날의 즐거움이었다. 더불어, 텐동이라고 하는 낯선 맛을 알아가는 즐거움이 있었다. 나의 우주가 약간이나마 커졌다.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동네 어린이 대공원을 산책한다. 배는 부르고 공기는 청량하고 나무들에게서 조금씩 봄기운이 느껴진다. 입에는 튀김의 맛이 감돈다. 문득 생각한다. 딱 이 정도가 행복의 최소조건이다.
적당한 거리의 음식점을 찾아갈 때의 두근거림, 기대한 맛과 기대 이상의 맛이 어우러진 만족감. 그리고 밤공기를 맞으며 산책. 이 다양한 감정이 어우러진 한 꾸러미가 행복이다. 적당한 거리에 있는 적당한 사이즈의 행복. 한 가지만 빠져도 행복이라고 하기엔 아쉬웠을 것이다. 이를테면, 식당이 너무 가까우면 일상이 되어 설렘이 덜할 것이다. 식당이 너무 멀면 가는 길이 피로할 것이다.
그날부터, 나의 행복의 최소단위는 텐동이 되었다. 애인을 만나러 가는 길은 훨씬 더 설렘이 있었으니, 5텐동 정도의 행복이라 치자. 쇠고기 살치살의 즐거움은 3텐동. 바다 노을은 7텐동. 미니스톱 빅도그의 맛은 0.3 텐동. 동네 꽈배기집의 씨앗호떡은 0.5텐동. 텐동을 기준으로 행복들을 하나씩 헤아려본다. 생각보다 행복이 제법 있고, 행복만은 못해도 소소한 즐거움이 여럿 있다. 다행이다. 그럭저럭 세상 살아갈 이유가 널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