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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잠 Jan 14. 2022

20220113

사실 원래부터 없던 것이라 생각하면 편하다. 태어날 때부터 없었던 것이니 잠시 잠깐 가졌던 순간에 크게 미련을 가지지 말자는 생각으로 산다면 크게 걱정할 일이 없다. 하지만 그러기엔 그 잠시 잠깐 가졌던 순간이 꽤 행복했다.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었고 그만큼 나라는 사람 자체에 여러 조건을 부여할 수 있었으니까. 또한 이 세상은 이미 모두가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세상이며, 어쩌다 잃은 사람들에겐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보여주지 못할 애석함을 가슴 속에 숨길 뿐이다. 분명 이런 내적/외적인 요소는 억울함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정말 내가 뭘 잘못했길래 이런 처분을 받아야만 하지? 그래, 백번 양보해 과거에 내가 했던 몇 가지 그릇된 행동에 대해 언급한다면 반성을 하겠다. 하지만 그게 이렇게나 큰 결과를 초래한다고? 이해할 수 없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한땐 받아들이려고도 했다. 크게 문제가 아닌 척, 덤덤한 척 받아들이며 ‘쿨'한 모습을 내비치려고도 했지만.. 실시간으로 악화하는 상황을 맞고 있노라면 그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매우 힘들다. 잠시만 신경을 쓰지 않다가 어느 순간 바라봤을 때 느끼게 되는 현재진행형 소멸. 그리고 그것이 더 과감해진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겪게 되는 쇼크. 심지어 더욱 괴로운 건 그것이 마지막이 아닌, 내게 남아있는 시간은 더욱더 최악을 향해 달려갈 뿐이라는 그 절망적인 확신이다. 그렇다. 정말 괴로운 건 현재의 나는 남아있는 인생의 내 상태 중 그나마 가장 멀쩡한 상태라는 것이다. 원망이라는 화살의 시위를 당겨 활을 쏜다면 그 과녁은 아마 끝나지 않는 시간여행을 해야겠지만 그래도 그 화살을 힘껏 당겨 쏘고 싶다. 내게 이런 상실을 가져다준 장본인에게.



물론 현대 과학의 힘을 빌려 조금은 더디게 혹은 원래의 상태로 되돌릴(그런 것처럼 보이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열역학 제2 법칙에 의하면 이 세상은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갈 뿐이다. 특히나 국소적인 시스템 내에서 엔트로피를 감소시키기 위해선 에너지가 투입되어야 한다. 그만큼이나 걱정이 되고 좌절을 한다면 에너지를 투입해보는 건 어떠냐고 누군가는 질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에너지라는 건 시간뿐만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재화’이다. 재화? 좋다. 투입할 수 있다면 투입하겠다. 하지만 재화를 얻기 위해선 안타깝게도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시간은 제한적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양쪽(과학의 힘을 빌리는/재화를 얻기 위한) 모두에 효과적인 방식으로 사용할 만큼 시간이 충분한 상황이 아니다. 재화를 얻기 위해 시간을 사용하다 보면 과학의 힘을 빌려 에너지를 투입할 시간이 남아있지 않은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물론 그뿐만이 아니다. 현재의 내 악화한 상황이 아직 마지막이 아니라는 팩트 또한 섣불리 재화나 시간을 투입하지 못하게 만든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그렇다면 아직 이런저런 이유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이 괴로움을 조금이나마 경감시킬 수 있을까? 여러 고민을 해봤지만 내가 내린, 내릴 수밖에 없는 결론은 그저 ‘숨기는 것'이다. 타인이 보지 못하게, 아니 타인은 둘째치고 나 자신이 보지 못하게 가리는 것이 현재로서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해결책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나의 결점을 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일순간만이라도 그 문제에 대해 고민하지 않게 만드는 것. 마치 문제가 가득한 상자는 뚜껑을 덮어놓기만 하는 방식,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가끔은 아예 상황이 심각해지기 바랄 때도 있다. 희망이란 것을 아예 내 안에서 깨부수고 싶으니까.. 하지만 그런 과격한 마음이 들다가도 이내 그나마 잔존하는 나의 현재 상태에 감사함을 느끼기도 한다. 이렇게나 내 마음을 흔들어대는 나는 언제쯤에나 평온해질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 초연하고 싶다. 아무렇지 않게,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고 싶다. 얼마만큼 내가 나를 사랑해야 이것마저 수용할 수 있을까? 결국 깨닫는 건 아직 내가 나를 많이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자기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모쪼록 2022년은 나 자신을 조금이나마 더 사랑할 수 있는 해가 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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