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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리 Oct 08. 2019

엽서 팔이 여행가

엽서 팔아 여행경비 마련하기

보통 영업직군이나 서비스직이 아닌 이상은 고객을 마주할 일이 별로 없다. 나의 직업은 개발자였고, 외부 영업을 다녀본 적이 없기에 연구소에 자리 잡고 묵묵히 개발만을 하던 개발자였다. 일을 하다 보면 고객들의 요구사항이 전달되지만 현실적으로 고객을 직접적으로 마주할 일이 없었다. 자연히 고객을 직접 만날 수 있다면 커뮤니케이션에도, 앞으로 일하는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가 속해있던 조직은 그게 쉽게 가능하진 않았던 조직이었다.


그런데 여행 중에 이런 기회를 맞이하게 됐다. 긴 여행을 마무리하기 전, 내가 가장 사랑했다고 말해도 모자람이 없는 곳. 네팔 포카라에 방문했다. 그곳에서 만났던 소중한 인연들에게 자그마한 선물을 해주기 위해 여행 중 찍었던 사진들을 인화하고 정리를 하고 있었다. 그때 어떤 어르신께서 한마디 거들었다.

사진 잘 찍네~ 한번 팔아보는 건 어때? 

그 말 한마디에 게스트하우스의 로비는 판매장으로 변했다. 찍었던 사진들을 모아 인쇄해놓고 팔기 시작했다. 장당 50루피에 10장 사면 1장 추가 지급. 인화비용이 장당 25루피 정도였으니까 원가율 50%로 판매, 500루피에 11장이니 275루피, 10장 사면 원가율 55%로 증가하는 구조였다. (벌써부터 원가 생각을..) 

게스트하우스 로비

어떤 사진이 얼마나 팔릴지 몰라서, 31장의 사진을 10장씩 총 310장을 뽑았다. 초반에는 각 1장씩 구매하는 사람이 많아서 골고루 잘 팔릴 거라 예상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어떤 사진은 잘 팔리고 어떤 사진은 잘 안 팔리기 시작했다. 특정 사진은 매진을 넘어서 예약자까지 발생했다. 3일 안에 인화해서 뽑아주겠다고 얘기했다. 아래 타지마할 사진은 너무 잘 팔렸다. 덕분에 수요 예측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고 수요예측=재고관리라는 것도 온몸으로 체험했다. 하루는 단골로 만든 사진 가게에서 인화가 안돼서 지연되는 경험도 했다. 내 사진을 예약한 여행자 한 명이 그 덕에 내 사진을 사지 못했다. 공급관리에 대한 중요성까지 한 번에 배웠다. 그래도 덕분에 네팔에서 사진만 팔아서 50만 원 가까이 벌었다. 거의 내 한 달 여행경비 수준으로. 덕분에 술이 비싼 네팔에서 술을 넉넉히 즐길 수 있었다.(?)

한국에 돌아온 뒤, 생각보다 네팔에서 사진이 잘 팔렸던 기억에 한국에서도 사진이 팔리지 않을까? 하고 생각이 들었으나, 단순히 사진으로 팔릴일은 없을 것 같고 엽서로 사업모델을 바꿨다. 그 당시 한참 인스타그램에서 아날로그 콘텐츠(필름 카메라 등)가 유행하던 때라 승산이 있어 보였다. 승부를 걸어보기로 했고 디자인 작업에 돌입했다.

엽서 디지털 원본

이미 보정이나 내가 여행지에서 느꼈던 감정들은 전부 담았고, 엽서에 나만의 어떤 표식을 넣을까 고민하다가 넣지 않는 걸로 결론을 냈다. 그리고 인테리어나 소장용으로 엽서를 사는 사람도 있겠지만 엽서의 본질인 전달에 포커스를 둬서, 직접 산 사람이 아니라도 이 사진이 어떤 곳인지 알 수 있게끔 오른쪽 아래에 자그마하게 국가와 지역을 표시했다.

엽서 뒷면

엽서 디자인의 꽃은 뒤편에 있는데 우선 우표를 붙이는 자리를 넣지 않으면 우표를 붙이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 같아서 우표 칸을 그려 넣었다. 그리고 내가 만들었으니까 나의 카피라이트를 붙여 넣을까 하다가, 나 자신을 홍보하기 위해서 만드는 건 아니므로 우표 칸 안에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넣었다. 가벼운 카피라이트 표식이자 우표를 붙이면 바로 가려질 수 있을 정도의 무게. 그것이 적당해 보였다.

또 여행지의 기념품샵에서 살 수 있는 대부분의 엽서는 편지를 쓰는 곳과 주소가 쓰는 곳이 분리되어 있다. 난 여행지에서 엽서를 자주 보내기보단 엽서를 사서 쓴 뒤 한국에서 직접 전달해주는 경험이 더 많았었기에 이런 부분이 몹시 싫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엽서를 팔다 보니 엽서를 직접 보내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거라 예상되어 최대한 쓰는 사람에게 자유도를 줄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

인쇄한 엽서

그렇게 해서 엽서가 완성됐다. 사진의 색감을 결정하는 방식과 인쇄의 색감은 다르기 때문에 여러 번 인쇄해야 할 줄 알았는데 꽤 원하는 색감이 잘 표현되어서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온라인 판매를 시작했다.

SNS를 통한 온라인 판매

한 장당 가격을 2,000원으로 책정했던 것은 장당 인쇄비+opp 필름 봉투가 220원 정도였고 택배비(등기비용)를 따로 등기비용만큼 받는 게 아니라서, 그리고 온라인 판매 엽서들의 가격이 전부 2,000원이어서 그렇게 정했다. 친한 사람들이 구매하면 몇 장씩 더 끼워주었다.

많지는 않지만 긴 여행을 하면서 온라인 팔로워가 꽤 생겼고, 여행 중에 만났던 형 누나, 혹은 동생들도 사줬다. (아마 이때 백수였어서 더 사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온라인 판매는 꽤나 성공적이었다. 

오프라인 플리마켓

성공적인 온라인 판매 이후 자신감을 얻어 오프라인에도 나가보았다. 그 당시 한창 인기 있던 스팀잇을 자주 사용했었는데 한국 스팀잇 커뮤니티에서 진행한 오프라인 플리마켓 행사에서 셀러로 나갔다. 개당 1,500원 정도에 판매를 시작했으나 잘 안 팔려서 2,000원으로 가격을 올렸는데 더 잘 팔리는 이상한 현상을 경험했다. 무조건 싼 것이 좋은 게 아니라 적정 가격이 중요하다는 배움을 얻었다. 특히 2030의 트렌드는 가치소비를 조금 더 하는 경향이 있다. 나 또한 2030을 대상으로 팔면서 그 점에 대해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 같다.


엽서 판매프로젝트를 한달정도 실행했다. 다른 플리마켓도 몇 번 나가봤는데 흥행을 한적도 있고 못한적도 있다. 그래도 20만원 가량 투자해서 100만원 가량의 순수익을 얻었다. 그리고 다시 20만원 가량을 투자해 주문을 했지만 나머지 물량은 거의 팔리지 않은채 주변에 나눠주었다. 

돈을 많이 벌지는 못했지만 고객을 직접 만나는데에 좋은 경험이 생겼다. 비록 크진 않지만 처음으로 기획부터 디자인 그리고 상품을 만들고 직접 영업까지 해보는 값진 경험이었다. 오프라인 비즈니스에 전혀 관심을 두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 경험 덕분에 O2O산업에 관심이 생기게 되었고. O2O 스타트업으로 입사해보려고 노력을 하게 되었다. (결과론적으로 블록체인 업체에 들어가긴 했지만....) 


서비스를 개발하는 개발자로서, 직접적으로 고객을 만나보고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좋은 시간이었다. 솔직히 아직 실제 고객을 만나게될 일이 많이 없는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더욱 좋았던것 같다. 이 경험이 결국 사용자를 위한 서비스를 만드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 정량적으로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는 판단할수 없지만. 스스로가 후회가 없는것이 바로 도움이 되었다는 증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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