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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집에 공간이 생기는 마법

중년 부부와 청소년 자녀가 사는 집

by 오르

인간의 생애 주기에 따라 한 가족이 살아가는 모양새도 달라진다. 아기자기, 달콤내 폴폴 나는 신혼부부의 집은 아이가 태어나면서 알록달록 육아용품이 점령한다. 안전과 청결, 아이의 지적 자극과 성장을 위해 거실이 서재가 되고 놀이방이 되는 현실. 시간이 흘러 아이들은 사춘기를 지나 성인이 되어가고 살림살이엔 세월이 묻어난다. 가정을 꾸린 지 18년째, 구성원이 자라고 늙어가면서 익숙했던 공간도 낡아진다. 집 구조의 재편이 필요하다.

어릴 적 아이들이 트램펄린처럼 뛰어놀던 소파를 버리고 나니 거실에 덩그러니 공백이 생겼다. 겨우내 집을 서성이며 머릿속으로 공간을 그렸다. 미적 감각도, 공간 감각도 뛰어나지 못한 데다 상상력마저 부족해서 그림이 그려지다 자꾸 멈췄다.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굴려봐도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럴 땐 직접 몸을 쓸 수밖에. 옛말에 머리가 나쁘면 손, 발이 고생한다고 했다. 어쩌랴, 고생스러워도 방법이 이뿐인 것을.


그날은 봄 햇살이 따사로웠다. 한들한들 움직이는 나뭇잎이 거실 창을 가득 채웠다. 간만에 날도 맑다. 창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다른 식구들은 회사로, 학교로 가고 집에는 기분 좋은 고요와 힘쓸 준비를 끝낸 중년 여성이 남았다. 좋네, 좋아. 오랫동안 계획한 일을 도모하기 딱 좋은 날이다.

거실 한편을 차지하고 있던 3미터 길이 서랍장은 며칠 전, 남편과 용을 쓰며 내다 버렸다. 묵은 세월을 거두겠다고 다짐하고 실행하는 데는 커다란 마음을 써야 했다. 신혼의 흔적이 하나 둘 사라지고 이제 거실엔 거대한 책장만 남았다.


일명 ‘거실 재탄생 프로젝트’의 첫 번째 목표는 안방 책상 옮기기. 안방에 책상을 들이고 개인 업무공간으로 만들었지만 오후만 되면 볕이 들지 않아 내 집중력은 자꾸 도망갔다.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가로 1400센티미터, 세로 80센티미터에 달하는 책상을 옮겨야 했다. 이번 프로젝트의 포인트는 세 남자의 도움 없이 나 홀로 모든 일을 마무리하는 것. 매끈한 여름이불을 꺼내 바닥에 깔고 책상 모서리를 들어 이불 위에 책상을 올렸다. 이리 조금, 저리 조금, 이불 양 끝을 잡고 살살 밀고 당기며 낑낑거린 끝에 책상은 안방에서 빠져나왔다.

안방 책상 자리에는 거실에 있던 안마 의자를 두기로 했다. 자신만의 공간이 없다고, 잊을 만하면 볼멘소리를 하는 남편에게 선사하는 자리다. 집안 발 딛는 곳이 모두 너와 나, 우리의 공간인데, 오십 줄에 접어든 그는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자신만의 아지트가 필요한 모양이다. 남자는 중년이 되면 자신만의 동굴을 파고 칩거한다고 했던가. 땅따먹기로 평수를 늘릴 수 없으니 그가 애용하는 안마 의자를 조금 더 아늑한 곳으로 옮기기로 했다. 퇴근 후 안마 의자에 앉아 얕게 코를 골며 쉬는 그가 심적 안정감을 누릴 수 있다면 뭔들 못 해주겠나. 안마 의자는 책상보다 더 무겁다. 이번에도 안마 의자 아래 깔린 자그마한 러그를 살살 잡아당긴다. 시간이 오래 걸릴 뿐 혼자서도 잘 한다. 느릿느릿, 꼼지락꼼지락. 안마 의자는 안방에 어여삐 자리 잡았다.


요원했던 프로젝트를 끝내고, 거실 가운데 놓인 책상에 턱을 괴고 앉아 창밖을 바라본다. 통창 가득 푸른 잎이 여느 카페 부럽지 않다. 책장과 책상만 있는 거실, 소파와 낮은 커피 테이블을 두어도 될 만큼 공간이 여유롭지만 당분간 이대로 지내도 나쁘지 않을 듯싶다. 집안 한가운데 생긴 여백이 새롭다. 엄마가, 아내가 혼자 어떻게 이 모든 것을 했는지 관심도 없는 남자들이지만, 괜찮다. 제 방에 콕 박혀 노트북을 바라보던 아이들이 거실 책상에 나와 공부를 하고, 책과 거리가 먼 줄만 알았던 남편이 독서를 하니 이만으로도 족하다.


공간은 만들면 생긴다. 필요와 결핍은 눈을 띄우고 몸을 움직이게 한다. 내 마음의 공간도, 머릿속 공간도 엉뚱한 감정과 생각으로 발 디딜 틈 없다면 정리하면 된다. 쓸모없이 에너지만 갉아먹는 모든 걸 한 데 모아 문 밖으로 내보낸다. 길을 만들어 바람이 지나고 햇살이 머무는 여백을 남긴다. 한결 여유가 생긴 공간에 활기가 돈다. 올해 가기 전 새로운 일을 도모할 힘이 차오르는 기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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