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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선생님이 그러면 어떻게 해요?"

글쓰기 선생도 글이 막힙니다

by 오르

글쓰기도 흐름을 탄다.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스타카토로 터지며 글이 호로록 나오는 '호황기'가 있는 반면 고구마 먹고 속이 막힌 듯 도무지 글이 이어지지 않는 '정체기', '불황기'도 있다. 작은 고백을 하자면, 근래는 후자다. 글을, 잘, 쓰고, 있지, 못,하,다...


책상 앞에 앉는다. 하지만 내 마음은 글로 파고들지 못하고 겉돈다. 창 밖에 눈이 머문다. 짙어져 가는 초록, 투명하게 흐르는 구름, 끝없이 펼쳐진 연한 빛의 하늘. "선생님이 그러시면 우리는 어떻게 해요? 선생님이 글을 못 쓰고 계시면 안 되죠…" 익숙한 목소리들이 귓가에 맴도는 것만 같다. 의자를 바짝 책상으로 당겨 앉고 허리를 곧추세운다. 시선을 노트북에 고정한다. 책상 위엔 마시다 만 커피와 오물오물 까먹은 과자 봉지, 책, 메모지가 널려있다.


나의 깔끔치 못한 글쓰기 현장을 공유하면 사람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다. "선생님도 글을 못 쓸 때가 있어요?" 입을 다물고 있는 수강생 중에는 속으로 흉보는 이도 있을지 모른다. 나에게도 바람이 있다면, 지치지 않는 로봇이 되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완전무결한 문장으로 휘갈기다가 흘끔 시계를 보고 중얼거리는 것이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다니! 넘치도록 썼으니 오늘은 여기까지!"


글을 못 쓰고 있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무엇을 써야 할지 몰라서, 제대로 된 글을 쓰고 싶어서, 기막힌 영감이 아직 내게 오지 않아서, 집중하기엔 너무 바빠서. 이유는 차고 넘친다. 지금 내게 해당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나 자신. 나를 감추고 싶은데 글을 쓰면 쓸수록 자꾸 내가 드러난다. 여기서 쓰는 자아가 모순에 부딪힌다.


하필 쓰고자 하는 글이 에세이다. 에세이를 쓴다는 건 나를 담는 일이다. 쓰면 쓸수록 과거의 실수, 남몰래 품은 콤플렉스가 문장 사이로 비집고 올라온다. 때로는 투명하게 때로는 탁하게 명도와 채도를 달리하며 글 쓰는 이의 과거와 현재가 드러난다. 쭉쭉 뻗어가다가 꺾이기도 하고, 자랑스럽다가도 부끄럽고, 기쁘고 행복하다가도 수줍고 억울한 기억. 지층의 단면처럼 삶의 마디마디 켜켜이 쌓인 흔적이 나타난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내게도 숨기고 싶은 치부와 아픔이 있다. 여전히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세상 앞에 내놓는 일은 두렵다. 날 것 그대로, 생살과 같은 비밀들이 만천하에 펼쳐질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나를 알지 못하는 낯선 이들에게 파편처럼 박혀 곡해될 것만 같다. 예기치 않은 날카로운 시선들 앞에서 미리 움츠러든다. 글쓰기 앞에서 나는 밴댕이처럼 작고, 애벌레처럼 연약한 존재가 되고 만다.


드러낼 용기가 부족한 채 감추려 애쓰면 글은 더 삐걱댄다. 결국은 지우고 다시 쓴다. 쓰다가 멈춘다. '나'를 거치지 않고는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없어서, 글 쓰는 동안만큼은 나 자신을 숨길 수 없어서 머뭇거린다. 팥 없는 찐빵을 찐빵이라 할 수 있나...? 이럴 땐 비밀 폴더를 연다. 마음껏 쓰는 게 먼저다. 다 쓴 다음 몸을 뒤로 빼고 멀찍이 떨어져 화면을 본다. 글을 읽으며 스스로 묻는다. '1번 공개해도 괜찮다, 2번 잠시 보류, 3번 이건 안 됨. 비공개'


공개와 보류 사이에 판단이 서지 않는 글은 지인 몇몇에게만 공개한다. 내겐 주로 함께 쓰는 글벗들이 대상이다. 4년 가까이 매주 글을 쓰고 피드백을 나누는 그들은 나를 속속들이 알아서 '개떡' 같이 써도 '찰떡' 같이 알아듣는다. "선생님, 이 표현은 오해를 부르기 딱인데요." "무슨 말하려는지 알겠는데 문장이 조금 복잡해요." 그들의 애정 어린 조언이 얹어지면 글은 더 간결하고 담백해진다.


오늘도 나는 엑스레이 기계 앞에 선 환자처럼 책상에 앉아 낯선 나와 마주한다. 깜박이는 커서 앞에서 얼마나 멈춰 서게 될까. 나 자신과 밀당이 끝나지 않는다면, 글의 공개 여부는 나중으로 미뤄둔다. 노출의 강도를 스스로 조절할 때 글은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내 안에 두려움까지 쓰고 지우고 고치겠다는 마음으로. 편집권은 100% 내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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