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행사를 준비한다고 분주하던 아이가 빈 손으로 집을 나선다. "챙겨야 할 게 있다며? 안 샀어?" "배송시켰어요. 학교로요." 문구점, 마트에서 금방 살 수 있을 텐데 몇 개 되지 않은 물건을 굳이 배송시키다니. "배송료가 더 많이 나오는 거 아니니?" "걱정 마세요. 저 유료 회원이라 무료 배송이에요." 짧은 대화 속에서 예상치 못한 단어가 자꾸 등장한다. 예전에는 손으로 직접 챙기는 게 당연했는데 이제는 클릭 몇 번으로 물건이 제자리를 찾아간다. 등굣길, 운전대를 잡은 나는 생각이 많아진다. 잠시 후, 아이가 말한다. "엄마, 제가 주문한 게 학교에 잘 도착했대요."
고등학생인 아이는 준비물을 '로켓배송'으로 주문한다. 개인 준비물은 집으로, 팀 프로젝트나 학교 행사에 쓸 '공공재'는 학교로 배송하는 게 나름의 원칙이란다. 숙제, 시험공부, 수행평가, 동아리 활동까지 하루 일정이 빽빽할 때 로켓배송은 무척 요긴하다. "엄마, 그래서 유료 회원에서 탈퇴할 수가 없어요." 저녁 늦게 주문해도 잠든 사이 집 앞에 물건이 도착하는 마력을 내 어찌 모르겠는가. 나 역시 다음 날 아침 식사 거리가 마땅치 않을 때 빛처럼 빠른 속도의 배송 서비스를 활용한다. 가끔 예정보다 늦게 도착돼 지난밤 손가락 노동이 허무해질 때도 있지만 대부분 대한민국 배송 기사님들은 고객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그래도 그렇지, 준비물을 학교로 직접 쏘는 건 적잖은 문화 충격이다. 엄마는 옛날 사람, 아들은 요즘 사람이어서 이런 것까지 세대 차이를 느껴야 하는가. 매사에 미리미리 준비하는 습관은 언제 배우고 훈련한단 말인가. 아들아, 자판기 버튼 누르듯, 클릭 한 번으로 안 되는 일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줄 아느냐.
아이는 추진력이 좋고 자신감도 크다.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과단성을 발휘해 실행하는 게 마치 로켓배송 같다. 그럴 때마다 따라붙는 부작용도 있다. 내일 마무리해야 하는 일을 오늘 시작해도 가능하다고 믿는 것. 한 끗의 디테일이 부족하다는 것. 조금만 여유를 두고 정성을 들이면 완성도가 올라갈 텐데 '화룡점정'은 아직 먼 일이다.
세상에는 하룻밤 사이 끝낼 수 없는 일이 있다. 장이 익고, 나무가 자라듯, 오랜 시간과 기다림이 필요한 일들 말이다. 대학 입시도 그렇다. 12년간 공부하고 애쓴 모든 것들이 퍼즐 조각처럼 맞춰져 결과로 나타난다. 아이는 몇 번의 시험에서 기대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자 조급해졌다. 단기간에 목표를 이루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결과는 야속할 만큼 한 발짝씩 더뎠다. 그럴 때마다 실망하고 조바심을 냈다. 부모로서 긴 호흡에서 아이를 다독이고 격려했어야 했는데 나 역시 그러하질 못했다. 1년이라는 기간을 두고 차근차근 쌓아가겠노라 생각했다면 어땠을까 싶다. 조금은 느려도 목표에 닿는 과정이 지금보다 기뻤을 게다.
인생은 속성(速成)과 만성(晩成)이 씨실과 날실처럼 얽혀 이뤄진다. 빠른 실행이 빛나는 순간이 있지만 큰 그림은 느리게 완성된다. 실패를 견디고, 시간을 버티고, 때를 기다려야 한다. 열매는 때가 되면 열린다. 한방은 없다. 우리가 주문한 물건이 몇 시간 만에 도착하는 세상이라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은 초고속 배송이 불가능하다. 그 느린 배송이야말로, 손에 넣었을 때 참으로 값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