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움직이는 문장들
어릴 적 처음 보는 언니가 집에 놀러 왔다. 스무 살은 넘었을 것 같았다. 손님을 대접하고 싶었지만 말이 막혔다. 그래서 책을 건넸다. 내가 가진 책 중 가장 '어른스러운'—<어사 박문수>. 나름 '어른 대우'를 한 건데 언니는 책장을 조금 넘기고는 가만 내려놨다. 그리곤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나보다 어른이면 책을 더 좋아할 줄 알았는데, 누구나 다 책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걸 그때 알았다.
선생님은 일기장에 문장 몇 개를 꼭 남겼다. 친구들에게 뭐라 썼는지 궁금해서 슬쩍 쳐다보면 친구들의 일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학교에서 일어난 일, 친구가 내게 했던 말, 엄마가 만들어준 음식, 아빠한테 혼난 일을 쓰면 금방 한 바닥 채워지던데, 전날 본 드라마 줄거리만 써도 팔이 떨어질 만큼 긴데 애들은 왜 안 쓰지. 선생님이 남기는 글에 칭찬이 들어 있으면 다음 날을 기대하며 더 신나게 썼다. 가끔 교내외 백일장 상이라도 받을 때면 어깨 뽕이 수직 상승했다. 그래도 작가, 기자, 교사, 이런 일을 하겠다고 꿈꾸진 않았다.
활자 중독 수준으로 읽고 쓰는 일에 골몰하면서도 어린 마음에 미세하게 감지한 게 있었다. 글쓰기는 꽤나 괴로운 일이며 이로 돈 벌기는 결코 녹록지 않다는 것. 그런데도 글을 쓰고 있다. 매일 글을 써서 사람을 만나고 월급을 받아 살았다. 내게 생계유지의 방편이 존재한다는 게 감사했지만, 글쓰기를 평생 업으로 삼은 게 최선의 선택이요 하늘의 뜻이라 여기진 않았다. 그럼에도, 어떤 순간에는 글만이 길이었다.
12년 전, 열흘짜리 해외 선교를 가고 싶어서 남편에게 편지를 썼다. '나 보내줘' '앞으로 잘할게' '일 열심히 해서 돈도 잘 벌게' 같은 궁색한 몇 마디 말로는 목적 달성이 어려워 보였다. 마음을 써 내려갔다. 책상도 없어서 낮은 거실장에 올려진 사진들을 치우고 쪼그려 앉아서 밤새 썼다. 모두가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동트기 전까지 썼다. 독립운동에 나가는 마음만큼 비장했다. 문장 몇 개 유려하게 만든다는 차원이 아니었다. 이거 아니면 내 나머지 인생을 책임져라,는 결의였다. 덕분에 남편은 허락했고, 이는 내 글쓰기 역사의 한 장면으로 또렷하게 기억됐다. 처음으로 생각했다. 내가 글을 쓰는 건, 삼엄한 취재 현장에서 분초를 다퉈 글 쓰는 훈련을 해 온 건, 다 이때를 위함이라. 그 밤 이후, 중요한 고비마다 나는 말보다 먼저 편지를 꺼냈다.
얼마 전 가족들과 식사 자리에서 분노했다. 부끄러워 자세히 쓸 수 없지만 굳이 그렇게 화를 내고 큰 소리 낼 일이었나 싶어서 바로 가족들에게 미안해졌다. 차라리 그 자리를 피할걸. 내가 드디어 미쳤구나... 오만 가지 후회로 어지러웠지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미안함을 적는 것뿐이었다. 활자는 콕콕 눈 속에 박힌다. 바람결에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서 읽고 또 읽을 수 있다. 미안함에 무게가 단단히 실릴 것 같았다. 현란한 타이핑 실력을 물리고 굳이 손글씨로 또박또박 썼다. '내 이야기를 좀 들어줘' 무언의 시위이기도 했고, '정말 미안해' 진심 어린 사과이기도 했고, '날 용서해 줘' 회개의 눈물이기도 했다.
세상에서 쓰기 어려운 글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이다. 결단하고 써야 한다. 볼록렌즈가 햇볕을 모으듯, 모든 마음을 그러모아 편지에 써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마음을 꿰뚫어 움직일 수가 없다. 편지 쓰기는 유독 에너지를 많이 요하는 일이다. 정성이 특히 필요한 글이다. 의미심장한 편지일수록 단어 하나, 쉼표 하나 고심해서 박아 넣어야 한다.
큰아이가 대학을 가기 위해 컬리지 에세이를 열심히 쓰고 있다. 살면서 이렇듯 자기 인생을, 자기 자신을 돌아본 일도 없었을 게다. 낳고 키운 어미로서 아이의 주요 성장 장면이 생각나서 의미를 잔뜩 부여해 글쓰기 선생답게 멋들어지게 말해 주곤 있지만, 잘 먹혀 들어가는지는 모르겠다. 아이는 대학 입학 사정관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쓰고, 난 이제 내 품을 떠날 그 아이의 마음을 얻기 위해 쓴다. 보름이 지나도록 내 편지의 수신자들은 답이 없다. 조금 언짢긴 했지만 괜찮다. 끙끙거리던 내 마음을 종이에 던져놓고 나니 후련하다. 잠시 주춤했던 글발도 살아난 것 같다.
편지를 쓰자, 편지를. 밋밋한 가족관계에 오그라드는 문자를 집어넣어 보자. 그럼 이런 말도 듣게 된다. "도서관에서 편지를 읽다가 울 것 같아서 아직 못 열어봤어요. 엄마 편지는 늘 감동적이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