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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간인 박씨 Mar 04. 2023

자연으로부터의 분리

현 인류의 보편적 근로 시간은 어딘가 인간의 내재적인 본성에 반하는 경향이 는 것 같다.

오랜 기간 수렵채집인으로 진화한 우리가

8시간의 근로 시간을 닭장 같은 사무실에 앉아서 지내기에 부적합하지 않을까?


시골로 향할 때, 분명 덜 일하고 평안한 삶을 찾으려는 목적이 있었건만

조직에 소속되어 일한다는 것은 결국 아주 평범하게 나인투식스를 직장에서 간을 보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도시에 있었을 때 보다야, 훨씬 많은 시간을 자연과 마주하고 있지만

자연보다 무실에 있는 시간이 너무 길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문득 인다.


굳이 근로 시간을 들먹인 이유는 무언가를 끊임없이'소비'하기 위해 지속적인 현금의 수급이 필요하고

돈이 돈을 낳는 궤도에 안착한 자가 아니라면 국 소비를 위해 일을 해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 때문이다.




최근 제임스 매키넌의 "디컨슈머"라는 책에서 일종의 이정표를 찾았다.


아주 간결하게 이 책을 소개하자면 과열된 소비주의가 인류에게서 휴일을 빼앗고, 지구를 망가뜨리며

철저한 성장 위주의 지표가 인간에게 더  중요할 수도 있는 "지표들을" 왜곡할 수 있다는 것이다.


코로나 19를 겪으면서 모두가 공황에 빠졌던 때, 되려 제임스 매키넌은 극단적인 가설을 제시한다.

소비가 멈췄을 때서야, 가까스로 탄소 배출량은 줄어들었고 지속가능한 소비, 녹색 소비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소비" 또한 그 자체로는 그다지 가시적인 성과를 보이지 못한다고 말이다. 결국 어떤 형태로든지 소비는 탄소를 배출한다는 것이다. 오랜 기간 동안 기업이나 사업체가 의도적으로 수명이 짧은 제품들을 판매함으로써 -계획적 진부화라고 한단다.- 많은 "양"의 소비를 하게 하며 일종의 카르텔처럼 질 좋은 상품(과학의 발전으로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이 퇴출됐다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작가가 불가능에 가까운 제로소비를 반드시 이뤄야 한다고 피력하느냐?

그것은 아니다, 대신 싼 값으로 양으로 승부하는 소비 대신 양질의(앞서 말했듯이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상품을 높은 가격에 생산하고, 또 소비함으로써 대체 경제 모델을 제시하기도 한다.

소비를 감소시키면서도 경제적인 쇼크에는 대비할 수 있게 연착륙하는 방안인 듯하다.


또 반소비주의자가 현실적으로 비주류에 속할지라도, 간소한 삶을 사는 이들이 분명 내재적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그 가치를 지키면 살아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대체로 자유로운 시간을 더 소중하게 여긴다.


책을 읽으며 반소비주의자라는 말보다는, 간소한 사람들이라는 말이 아주 맘에 들었다.


한편 책 후반부 즈음에는 우리보다 먼저 지방인구소멸이 시작된 일본의 예도 아주 흥미로웠는데, 일본의 사도섬이라는 곳이 인구가 감소하며 지역경제가 작아지는 와중에도 간소한 소비와 자연으로의 복귀를 통해 결핍 없이 살아가는 방법을 보여주며 되려 시골에 일본의 미래가 있다는 대담한 제시까지 한다.

 




애초에 물질적인 것에 큰 관심이 없고, 되도록 음식은 가까운 자연에서 자급자족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같은 작가의 "100마일 다이어트"라는 책에유사한 내용이 나온다.) 나는  분명 비주류이면서도 또 간소한 삶을 꿈꾸고 있다.


물론 근검절약하며 소비가 0에 가깝게 수렴하냐 하면 단연코 아니다. 지 지금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할 뿐이다. 여러 번 심사숙고하려고 하며, 한번 산 옷은 10년 가까이 입기도 한다. 

빼곡하게 찬 옷장 앞에서 '유행이나 디자인의 요소를 제외한다면, 이 옷들만으로도 나는 죽을 때까지 의식주의 '의'를 해결할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러다 보면 '옷'이란 본질적으로 무엇인가? 하는 허무맹랑한 사색이 꼬리를 잇고 소비욕이 감퇴되기도 한다.


플라스틱이  많이 배출되는 포장음식보다는 집에서 정갈하게 차려진 저녁식사를 선호한다. 텃밭에서 채소를 키우는 건 당연히 시골살이의 재미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 품목이라도 자급자족 함으로써 탄소 배출량을 줄이고 건강한 식단에 가까워지고자 함이다. 


 커다란 도시 속, 물질적 풍요의 세상에서 우리는 선조들보다 많은 옷 가지를 가지고 살고, 근사한 차를 몰고, 더 많은 가짓수의 음식과 기름진 요리의 향현을 맛보고 사는 데 정신은 왜 이리 피폐해져만 가는 것 같은지.


도시에 살 땐 보이지 않는 어떤 상관관계 같은 것들이 어렴풋이 보인다.

낮아진 저수지의 수위는 작년, 또 재작년의 수위와 다르고

매년 기후가 달라진다. 농작물의 작황도, 꽃의 개화도 섬찟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농부들은 터전에서 오랜 세대 길러온 작을 포기하고, 열대작물을 길러야 하는  갈림길에 있다.

작년에는 분명 숲이었던 곳이 며칠 사이 태양광 패널들이 올라와 있는 가 하면,

포클레인이 지나간 자리에는 나무가 다 베어져 밑동만이 남아있다.

불과 몇 년 사이인데, 10년 20년 후엔 괜찮을까? 하는 기이한 의문이 시각적으로 보인다.


한 덩어리다. 소비가, 근로 시간이, 환경이, 쓰레기가 결국에는 다 한 덩이처럼 보인다.

근로시간 동안 우리는 소비를 위해 돈을 벌지만 자유 시간과 의사를 박탈당한다. 사색하고 고찰할 시간을 잃는 대신 급여를 받아 소비 여력 생긴다. 그만큼 자연에서 생산적인 활동을 할 시간을 잃는다. 직접 재배하거나, 땅을 경작하거나. 자연 혹은 먹거리에서 인간의 분리가 생기는 것이다.  마트에서 누군가 대신 재배한 농작물을 구매하거나 대신 요리한 포장 음식을 얻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 것이 인류 발전의 위대한 결과물이며 편리함을 가져와 삶의 질을 향상하는, 수십억 명의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이자 구조라고 말할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원시 시대로 돌아가고 싶은 것도 아니다.  이미 고도화된 인간 문명이  근로 시간과 소비가 다소 줄어든다고 해서 존엄성을 잃고, 뒷걸음질 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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