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 이하 생략 -
시인 정지용이 일본 유학시절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썼다는 이 시를
학창시설에는 수능특강에서 공감각적 표현으로, 돼지꼬리 땡땡을 치고 달달 외웠었다.
해설피는 어학 사전에는 "해 질 무렵 햇빛이 옅거나 약한 모양"으로 정의되어 있는 데,
공감각적 표현도 원본을 알아야 이게 아름다운 표현이라고, 공감 시도를 해보는데
소 울음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는 수험생은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라는 마음의 소리를 죽이고
그저 청각의 시각화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열심히 메모했을 뿐이었다.
더위가 한창이던 이번 여름 드디어 소 울음소리가 지척에서 들리는 집으로 이사를 했다.
지난 글에서도 말했듯이 첫눈에 쏙 들어 계약, 매매, 리모델링과 입주까지 장장 1년 8개월 기다린 집이다.
집 대각선으로 150m 정도에 작은 물길을 끼고 소 축사가 있는데 여기서 들리는 소들의 울음소리에 문득 '아 저렇게 게으른 울음을 우는구나' 하고 15년 전에 배운 시가 떠오른 것이다.
이제야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황소가 해설피 게으른 울음을 우는 시인의 고향이 그린 듯 상상된다.
50평 남짓 되는 뒷 밭에는 전주인들이 심어놓은 옥수수가 사람키보다 높게 자라,
수염을 이리저리 날리고 있고 도라지 꽃망울이 풍선처럼 부풀어있었다. 비탈에는 호박이 크고 있다.
낯선 곳에 적응하기 유달리 힘들어하는 나는 이사를 하고도 한 동안 잠을 푹 자지 못했는 데 이제는 선선한 가을바람을 솔솔 맞으며 밤잠을 청하고 있다.
이사 후 할 일은 왜 이리 많은 지 옥수수 수확을 한번 못 했고, 도라지 꽃망울은 다 어디로 갔는지 꽃망울이 사라지니 무엇이 도라지고 잡초인지 알 길이 없어졌다. 둘 다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퇴근 후에나 짬짬이 정원도 꾸미고 마당 정비도 시도하는 데, 시골 주택에 산다는 건 어디서 일이 계속 생성되는지 쉴 틈이 없다.
2평 남짓 소박한 마당이 전부였던 지난 벽돌집과 달리
마당(텃밭도 있다)에, 뒷 밭에, 창고에 젊은이 둘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타샤의 정원을 목표로 야심 차게 가드닝을 꿈꾸지만, 직장러에게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일단 첫 삽이라도 뜨자 싶어 정원 장미를 공수해 심었다.
영 진척이 없어 마음이 급해지다가도, 이 집에 한 두해 살 것도 아니고
여유롭게 살려고 내려온 건 데 이런 것에 조급해 말자하고 마음을 달래 본다.
살면서 천천히, 여유롭게-
꽃나무가 당장 꽃을 보여주지 않는 것처럼
때가 되고 계절이 맞으면 탐스럽게 올망졸망 조성될 화단을 기대하자.
완성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다. 꽃밭이라는 건,
내가 어떤 예쁜 꽃을 발견할 줄 알고.
어울리는 곳에 옮겨 심고, 가지도 잘라주고 또 추운 겨울에 냉해를 입으면 뽑아내고
땅을 빡빡하게 가득 채우지 말고 이 아이, 저 아이 줄기와 가지를 넓게 펴갈 수 있게 여유를 주자
처음에는 화단을 정리하면서,
우리 입맛에 맞게 꾸미고 싶어 전 주인들이 심어놓은 꽃나무들을 몇몇 베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나무에 생명이 있어 함부로 베면 안 된다고 생각해
웬만하면 이래 저래 나무에 말을 걸어주고 베는 데(어디서 본 게 있어 가끔 어명이요-! 도 외침),
내가 부재한 사이 남편이 몇 그루를 베었다.
아니나 다를까 동티가 났는지
다음날 내가 마당 돌계단에서 크게 넘어졌고 그 이후로는
남은 아이들을 배어내지 않고, 잎과 가지를 정리해 되도록 앞으로도 같이 가려고 한다.
나보다 먼저 이 집에 터 잡은 생명들인데, 일말의 죄책감도 들고
잘 가꾸다 보면 서로 정도 들겠지 싶어서 말이다.
친구 아버님이 직접 만들어주신 솟대도 마당 정중앙에 입주했다.
마을 수호신 및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의 솟대
여섯 마리나 데려왔으니,
앞으로 풍년도 갖다주고, 오래오래 우리 집을 수호해 주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