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전조선축구대회는 ‘조선체육회(현 대한체육회)’가 주관한 대회였다. 지금이야 체육 종목별 연맹이나 협회가 별도로 있지만 스포츠 도입 초기에는 종목이 세분화되지 않았다. 1920년 탄생한 '조선체육회'가 여러 종목을 관장하다가 종목 별 단체가 하나씩 생겨난다. 1923년 조선야구협회, 1933년 조선축구협회, 1936년 조선역기연맹(역도)이 창설되는 식이다. 대한축구협회 FA컵 뿌리가 되는 전조선축구대회를 ‘조선체육회’가 주관한 배경이다.
스포츠 초기 역사는 모두 이어져 있다.
이는 조선심판협회, 조선축구협회 조직 구성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독립운동가 몽양 여운형은 대한축구협회 2대 회장을 역임했다. 몽양은 해방 후 조선체육회장과 조선올림픽위원장을 맡아 대한민국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가입에 기여했다. 덕분에 한국은 정부 수립 전인 1947년 IOC에 가입, 1948년 생모리츠 동계 올림픽, 런던 하계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었다. 1948 런던 하계 올림픽 폐막 다음 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1928년 조선심판협회 발기인, 위원으로 참가했던 문곡 서상천은 역도연맹회장, 대한씨름협회장을 역임했다. 대한역도연맹은 역도를 처음 도입한 그를 기리는 ‘문곡 서상천배 역도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역도(力道)'라는 이름도 그가 만들었다. 체육을 넘어 종교, 도덕 차원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뜻을 담았다. 그전에는 역기(力技)라고 불렀다. 역도가 '대한민국' 이름으로 획득한 첫 번째 올림픽 메달(김성집, 1948년 런던 동메달)인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대한축구협회 3,4대 협회장을 역임한 고원훈은 전국체육대회 기원인 1920년 전조선야구대회 개회 선언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
야구계에는 '이영민 타격상'이 있다. 한국 야구 전설 이영민을 기리는 상이다. 야구와 축구 모두에서 활약한 이영민은 1935년 전경성축구단이 일본이 주최한 대회를 휩쓸 때 축구선수로 뛰었다. 1933년 조선축구협회 창립에도 크게 기여했으며,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출전한 축구팀 감독을 맡기도 한다. 야구 전설이자 축구 전설인 셈이다.
종목이 아닌 인물을 중심에 놓고 보면, 한국 축구사 이전에 한국 체육사를 만나게 된다.
대한체육회 '전국체육대회'가 ‘야구대회’를 계승한 이유
지난해 2019년, 제100회 전국체육대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대한체육회는 1920년 '전조선야구대회'를 전국체육대회 기원으로 보고 있다. 지금 같은 종합경기대회는 1934년 '전조선종합경기대회'가 처음이었다.
전조선야구대회는 1920년 11월 4일 월남 이상재 시구로 막을 열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열린 근대 스포츠 대회였다. 전조선야구대회를 상징으로 한국에 근대 스포츠가 자리 잡을 수 있었고, 스포츠 보급이 확대돼 1934년 종합대회 전조선종합경기대회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손기정과 남승룡 금메달과 동메달 역시, 한국 체육 전반이 성장했기 때문에 이룩한 성과였다.
1920년 전조선야구대회는 한국 근대 스포츠 출발을 알리는, 야구를 넘어서는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대회였다. 대한체육회가 ‘단일종목대회’ 전조선야구대회에서 ‘종합경기대회’ 뿌리를 찾고 대회 100주년을 기념한 이유다.
대한축구협회 FA컵 뿌리 ‘전조선축구대회’는 한국 축구뿐만 아니라 한국 체육 100년 역사기도 하다. 한국 체육 전반과 만나게 되는 축구 역사 ‘전조선축구대회’는 '전조선야구대회' 못지않은 큰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