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년 6월(고종 19년) 영국 군함 플라잉 피시(Flying Fish) 호 승무원이 인천항을 통해 축구를 처음 보급했다." 현재 정설로 여겨지는 이야기다. 하지만 "1894년 관립한성영어학교를 통해 대한민국에 최초로 축구가 도입되었다, 더 늦은 1905년 도입되었다."는 다른 견해도 존재한다.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는 상태다.
개인적으로는 1890년대 중후반 무렵 도입됐다고 생각한다. 현재 정설로 여겨지는 1882년부터 1890년대 사이에 이렇다 할 축구 기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사실관계를 파악해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당장 시기를 특정할 수는 없지만, 국내에 유입된 축구는 빠르게 퍼져 나갔다. 1905년 6월 10일 훈련원(현 DDP 부지)에서 대한체육구락부와 황성기독청년회가 최초로 공개 축구 시합을 가졌다. 1905년은 이완용 등이 을사늑약을 체결한 해였다. 국가의 명운이 바람 앞 등불이었던 시기. 2년 후인 1907년, 일제가 보안법을 공포하면서 사람이 모이는 축구 경기도 위축됐다. 변화가 일어난 건 식민지로 전락한 후인 1920년대였다.
1921년 2월, 국내 첫 축구대회가 열렸다. 조선체육회가 주최한 '전조선축구대회'였다. 대회는 추운 날이었던 2월 11일 열렸다. 왜 하필? 축구원로 박경호는 "전조선축구대회는 3·1 운동에 힘입어 민족자존을 지켜질 수 있다는 자각 속에서 열렸다. 당시 축구인들은 일제 간섭 없이 한국인(조선인)만의 축구대회가 열린다는 흥분이 가득했다"라고 회고한다. 이왕 대회를 할 거면 빨리하자는 여론이 이른 개최를 결정지었다. 일제가 억눌렀던 축구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다만 축구 활동 자체가 위축되면서 축구가 체계적으로 정비되지는 못했던 듯하다. 경기 규칙은 일본 『아사히신문』이 발행한 「운동 연감 축구경기규칙」을 번역해 적용했다.
"대회를 성급히 열면 운영이 힘들 수 있다. 준비를 갖춰 개최하자"는 의견도 있었는데, 이들의 우려가 적중했다. 참가팀 전반에서 규칙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해 대회 운영이 차질을 빚었다. 대회를 앞두고 경기규칙서를 배포하고 규칙 해설까지 했지만 참가팀들이 이를 단기간에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판정 문제가 불거졌고 원년 대회 우승팀이 없다.
이런 풍경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축구 종가 잉글랜드에서도 규칙이 달라서 경기가 파행을 겪은 사례를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축구 역사 초기의 보편적인 모습이다. 다만 무리한 일정 탓에 공식 대회에서 문제가 있었고, 이로 인해 원년 대회 우승팀이 없는 역사는 다소 아쉽다. 전조선축구대회는 대회 강령, 심판규정 등을 정립하며 다음 해 2회 대회부터 온전히 자리 잡는다. 평양무오단이 우승을 차지하며 첫 우승팀으로 이름을 남겼다.
당연히 전조선축구대회를 개최할 당시에는 축구 저변이 아주 열악했다. 판정 문제는 둘째 치더라도, 심판 인력 자체가 부족했다. 때문에 대회에 참가하는 학생들이 돌아가며 부심을 보는 식으로 경기를 가졌다고 한다. 대회를 거치며 심판 인력이 양성됐고 1924년 제5회 대회부터는 주심과 부심을 모두 볼 수 있는 '공식 심판진'이 꾸려진다. 대회가 자리 잡으면서 가능한 발전이었다.
전조선축구대회는 "규칙을 정립하며 축구 발전의 초석을 놓았다"는 의미를 지닌다. 대한축구협회가 발간한 『한국 축구 100년 사』는 "경기 진행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규칙 채택으로 축구 발전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라며 대회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헌법에 비유할 정도로 축구 규칙이 자리 잡은 건 결정적인 일이었고, 전조선축구대회는 이를 가능케 한 대회였다.
잉글랜드(동시에 세계) 최초 축구대회 'FA컵'은 축구 규칙이 자리 잡는 데 기여한 대회였다.
한국 최초 축구대회 '전조선축구대회'는 축구 규칙이 자리 잡는데 기여한, 대한민국의 FA컵이었다.
※ 참고. 축구 규칙의 중요성은 '우연히(?) 탄생한 대회가 가지는 의미'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