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 창설 - 대회(FA컵)를 통한 규칙 정립 - 저변 확대 - 직업선수(부정선수) 출현 - 프로화 및 리그 창설"
잉글랜드 축구는 이 같은 5단계 흐름을 거치며 발전했다.
1921년 2월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를 통해 '축구 규칙'이 자리 잡았다. 2단계에 해당한다. 1단계 조직 창설은 별도로 설명이 필요하다. 오늘날 축구를 관장하는 대한축구협회가 아니라 조선체육회(현 대한체육회)가 전조선축구대회를 개최했기 때문이다.
간략히 언급하면 한국 축구의 '조직 창설'은 1, 2, 3단계가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이뤄졌다. 한국 스포츠 발전의 특수성이 담긴 현상인데, 이와 관련해서는 별도로 다루기로 하고 우선 2단계 이후 흐름부터 살펴보자.
전조선축구대회를 통해 경기 규칙이 자리 잡기 전에는 소위 들어뽕이라고 부르던 규칙 없는 축구가 성행했다고 한다. 대한축구협회는 전조선축구대회를 두고 "지방마다 다른 규칙으로 축구를 즐겨온 팀끼리 교류를 추진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라고 말하고 있다. 3단계에 해당하는 설명이다.
전조선축구대회 개최 다음 달인 3월, 인천에서 열린 축구대회에 관중 1천여 명이 경기장을 찾았다. 같은 해 5월에는 지역이 다른 전주청년회와 광주청년회가 교류 시합을 가질 수 있었다.
이듬해 6월 황해도 축구대회, 8월 함경도 북선축구대회가 열리는 등 전국에서 축구대회가 열렸다. 규칙이 자리 잡았기 때문에 가능한 현상들이다.
전조선축구대회도 전국대회 다운 면모를 조금씩 갖춰 나갔다. 1922년 11월 제3회 전조선축구대회는 개최지에서 80km보다 멀리 위치한 팀에게는 대회 참가 비용을 지원했다. 1925년 경성운동장이 지어지며 근대식 체육 시설을 갖추게 됐고, 1927년 제8회 대회부터는 경성운동장에서 경기를 가졌다. 그 전에는 배재고보 운동장, 휘문고보 운동장 등 학교 시설에서 경기를 가졌다.
1929년에는 경성과 평양이 맞붙는 '경평 축구대항전'도 처음 개최됐다. 똑같은 규칙이 전국에 자리 잡았고 지역을 넘어서는 라이벌 구도도 형성돼 갔다.
1936년 4월 『조선중앙일보』 주최로 제1회 도시대항축구대회가 열렸고 전국 10개 팀(경성, 평양, 함흥, 원산, 마산, 군산, 안악, 진남포, 순천, 제주)이 참가한다. 전국 각지의 팀들이 한 곳에 모여 경기를 가질 수 있을 정도로 축구 저변과 규칙이 확실히 뿌리내린 상태였다.
축구 원로들의 회고에 따르면 하나같이 1930년대 후반을 한국 축구 최대 전성기로 꼽는다. 전국 팀들이 모여 대회를 가졌고, 지역 대회도 전국 각지에서 열렸다. 몇몇 선수는 '촌(村) 축구대회, 시골 축구대회'로 불리던 지역 대회를 찾아다니며 돈이나 향응(음식, 숙식 등)을 제공받으며 경기를 뛰었다. 부정 선수였다. 하지만 다른 팀들도 같은 방식으로 선수를 수급해 경기에 임했고 우승하면 지역 전체가 잔치를 벌일 정도였다고 한다.
잉글랜드 축구 초기 '부정 선수'가 무더기로 발생하며 직업 선수가 허용됐고 프로리그까지 창설됐다. 이 같은 역사와 대조해보면, 시골 축구대회를 찾아다니며 경기를 뛰었다는 선수들은, 한국도 직업 선수가 출현하는 4단계 발전 흐름까지 나아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전조선축구대회는 잉글랜드 FA컵과 똑같은 축구 발전 흐름을 가져갔던, '한국의 FA컵' 대회였다.
하지만 한국의 굴곡진 현대사는 그다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일제는 침략전쟁을 본격화했고 한반도 역시 전쟁의 포화에 휘말렸다. 해방 후에는 미국과 소련이 주둔하며 혼란스러운 해방정국을 가졌다. 한국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도 겪어야 했다. 단계를 거치며 차곡차곡 발전하던 축구 저변도 와해됐고, 폐허 속에서 다시 출발해야 했다.
한국 축구 프로리그, K리그는 1983년 전두환 정권이 만든 슈퍼리그에서 출발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굴곡진 현대사가 아니었다면 한국은 지금보다 더욱 긴 K리그 역사를 가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역사에 가정은 없다.
※ 전조선축구대회 이후 축구 저변(3단계)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직업 선수(부정 선수 4단계)개념도 태동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