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에 내가 예전에 남긴 글들에 공감을 누르고 가시는 분들이 있다.
그러면 나는 오랜만에 알림이 뜬 그 글들을 다시 접하곤 하는데
그럴때면 나는 n년 전과 확 달라진 팔땡의 모습에 흠칫 놀라곤 한다.
며칠 전에도 사람들은 내 오래된 글들에 하트를 누르고 갔고
본의 아니게 예전 글들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팔땡이 5~6세가 될 때까지만 해도
나의 글들의 대부분의 주제는
또래와 놀지 못하는 아이
또래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아이
자기주장 못하는 아이
사회성이 떨어지는 아이
예민한 아이
소극적인 아이
와 관련된 글들이었고
그런 글들에 몇몇 분들은 공감을 하기도,
또 어떻게 해야 개선시킬 수 있는지 질문을 하기도 했다.
당시엔 나도 그것을 겪어내는 중인
ing 현재진행형의 상황이었던지라
명확한 답을 던져 주기가 뭐했다.
나 역시도 교과서에서 배운 이론을 적용해 보기도 하고,
이 방법 저 방법 시행착오를 겪어 나가는 중이었기에
그들에게 시원한 답변을 주지 못한 것 같다.
팔땡은 이제 8세, 초1 언니가 되었다.
그리고 나 역시 육아 8년차의 엄마가 되었다.
8년의 세월을 겪어오며
팔땡의 행동들이 더이상 문제로 떠오르지 않게 되며
(사실 예전 글이 알람으로 뜨지 않았다면
어릴 적 그런 고민들을 했다는 사실 조차 잊을 정도로
나는 팔땡의 그런 모습들을 까맣게 잊고 살고 있었다.)
이제야 당당히 '나의' 답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나의 답'이라는 것은
답은 꼭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며,
이 또한 과정에 있는 것일 수 있기에
내가 찾은 답이라는 정의를 내리고 글을 시작한다.
그래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진짜 진부하고 따분하고 당연한 말인
'아이를 믿어주는 것'
이 글을 보고서 인상이 팍 찌푸려지는 사람들도 있을거다.
육아서에서 정말 오질나게 들어오던 이야기이고
누구나 알 법한 이야기이니까.
또 나름 아이를 믿는다고 자부하는 엄마들도 많기에
이것이 답이라는 말에 허무맹랑함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나는 팔땡의 소극적인, 사회성이 결여된, 자기주장을 못하는, 예민한.... 등등의
많은 부분을 문제라고 치부하던 엄마였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향의 아이상이 존재했고
그러한 건강한 아이상에 들어맞지 않는 아이의 모습에
문제가 되는건 아닌지,
사회에 나가 어떻게 살아나갈런지,
걱정과 함께 답답함을 느끼던 엄마였다.
그런 아이에게 나는 또래에게 다가가 보라고,
놀이터에서 어떻게든 친구를 만들어 주려 엄마가 나서서 노력하기도,
자기주장을 못하는 아이를 보며 화를 참아내기도 하며
아이의 행동을 늘 문제라 생각해왔다.
사실 기질 자체가 이런 성향의 아이일 수도,
혹은 환경에 의해 아이가 이러한 성격을 키워낸 것일 수도,
혹은 둘 다에 의해 아이의 이러한 모습이 강화되어 왔을지도 모른다.
어쨋거나 현재 아이의 그러한 모습은
기질이든 환경이든
아이의 현재 참 모습이다.
그러한 아이에게 그러한 행동이 잘못된 양, 문제인 양
부모는 계속해서 답답함과 걱정을 가진다.
아이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인정해 주지 못하고
아이를 있는 그대로 믿어주지 못한다.
부모가 불안한 이유가 무엇인가.
아이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게 종종 아이에 대해 고민을 털어놓는 엄마들을 만나곤 한다.
그러면 나는 되묻는다.
"아이를 믿으세요?"
그러면 그들은 당연히 믿는다고 말한다.
그 믿음의 참 의미를 몰라서 하는 말이다.
표면의 믿음만을 가지고 믿는다고 이야기한다.
정말 믿는다는 것은
아이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대로 살더라도 아무 문제 없을 것이며
혹여 문제가 생기더라도 아이의 힘으로 헤쳐나갈 수 있다는
단단한 믿음이 있다는 의미다.
애초에 아이를 믿는다면 부모는 불안이 올라올 일이 없다.
아이가 문제가 없을 것인데 무엇이 불안해서
그 행동이 자꾸 문제로 보이고,
걱정이 되고,
심지어 고쳐줘야 한다는 생각을 갖겠는가.
문제가 되더라도 아이가 충분히 헤쳐나갈 힘이 있다면
무엇이 그리 걱정이 되어 부모가 나서서 해결하려 하겠는가.
불안의 씨앗은 충분히 믿지 못하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부모는 겉으로 믿는 척,
표면의 얕은 믿음만으로 내 아이를 충분히 믿는다고 말한다.
물론 심각한 문제행동을 보이는 아이들이 일부있다.
자신과 타인에게 해를 입히거나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행동이 과도한 경우와 같이
극단의 경우에는 부모가 개입하여 바로 잡아주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한 극단의 경우가 아님에도
아주 사소한 문제 행동을 가지고
부모는 금세 불안해지고 걱정에 휩싸인다.
그리고 나 역시도 그러했다.
아이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나에게는 문제행동의 시그널이었다.
그러던 내가 이젠 아이를 전적으로 믿기 시작했다.
처음엔 믿음이 쉽지 않았다.
나 역시도 걱정되고 불안한 마음이 있었지만
의식적으로 믿어보려 노력했다.
아이의 친구 엄마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종종 그런 말씀들을 하신다.
"내 성격 닮으면 안돼"
자신의 성격대로 살아와보니 너무나 부정적이고 힘든 일이 많았던 엄마들은
아이가 자신과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비슷한 생각을 하며
비슷한 환경에서
비슷한 삶을 살아나갈까 걱정이 되어
성격도, 공부도, 환경도
열심히 노력하여 바꿔주려 한다.
적어도 자신보다는 나은 삶을 살길 바라서.
그리고 그러한 것이 불안의 씨앗이 되어
나와 비슷한 모습이 나타나면 불안하고
내가 생각하는 이상향의 아이상과 다른 모습이 나타나면 걱정이 된다.
하지만 사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농담삼아 완벽하면 그것이 정신질환자라는 말을 하곤 한다.
그만큼 완벽한 것이 이상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원.래. 부족하다.
원.래. 모자라다.
원.래. 이상하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는 정상인이라 부른다.
부족한 것이 너무나 당연함에도
우리는 아이들을 완벽에 가까워지게 만들려 노력한다.
아이를 있는 그대로 봐주지 못한다.
진짜 웃긴건 당신 역시 완벽하지 못하면서,
당신 역시 부족한 것 투성이면서
아이에게는 완벽에 가깝길 바란다.
완벽한 이상적인 아이상에 끼워 맞추려고 한다.
그럼 반대로 당신은 완벽한 부모상인가.
완벽한 인간상인가.
부모로서 소리치고 화내기도 하고,
돌아서서 죄책감을 느끼기도 하고,
아이가 때론 귀찮기도, 밉기도 하다.
아이에게 매일 24시간 무한한 사랑만을 퍼주지도 못한다.
그러면서 부모는 아이에게는 이상적인 아이상이 되길 바란다.
원래 인간이란 부족한 존재이고
부족해야만 한다.
결핍이 있어야, 열등감이 있어야, 수치심을 가져야, 불안을 느껴야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이 인간이다.
주변을 둘러보라.
완벽한 인간? 아무도 없다.
완벽한 아이? 역시 없다.
이상적 아이상
이라고 생각했던 엄친딸, 엄친아
자세히 보면 그들 역시 단점이 존재한다.
심지어 한두개가 아니다.
그들 역시 수가지의 단점이 존재한다.
내 아이가 아니니까.
가깝지 않으니까.
알 수 없는 그들만의 단점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 아이의 모자람을 그저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된다.
그냥 그게 내 아이인 것이다.
그러한 모자람을 가진 내 아이.
사실 아이는 그러한 자신에게 큰 불만이 없다.
부모가 문제라고 인식하고 걱정하고 불안해 하고 잔소리 하는 순간부터
아이는 스스로를 문제라고 인식하게 된다.
엄마가 원하는 아이상과 같은 행동을 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수치심, 한심함, 불안함, 죄책감, 죄의식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부모의 그런 시선이 없다면
아이는 스스로를 문제라 느끼지도,
부족하다 느끼지도 않는다.
그냥 자신의 그러한 특성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살아간다.
"아이가 평생 이렇게 살까 걱정돼요."
아이가 스스로를 문제라 여기지 않는데
스스로가 불편하지 않다는데
아이가 평생 그렇게 살면 어떠한가.
스스로가 괜찮다는데 그렇게 살면 어떠한가.
아이의 인생이다.
부모가 개입해서 이래라 저래라 할 문제가 아니다.
아이가 부딪혀 보고
아이가 겪어보고
아이가 고쳐나가든, 그대로 살아나가든
스스로가 결정할 문제이다.
인간이란게 참 신기하게도
나약하면서도 강인하고
부족하면서도 그것을 채울 줄 안다.
모든 인간은 생존전략을 발전시킨다.
삶의 풍파에 노출되었을때 그냥 두손 두발들고
손놓고 멍하니 환경에 휩쓸리고 당해버리는 존재가 아니다.
아이들만 봐도 그러하다.
불편감이 들때 부모에게 말도 해보고, 안되면 울어도 보고,
그것도 안되면 떼도 써보고, 안되면 소리도 쳐보기도 한다.
이것저것 시도해보다 결국 가장 자신에게 잘 먹이는
자신만의 방법을 고안해 내고
그것을 생존 전략으로 발달시켜 나간다.
인간이란 이런 존재다.
적응력이 얼마나 좋은지
인류가 생긴 이레 우리는 그 적응력으로
지금까지 살아남아 지구의 주인이 되었다.
그렇기에 아이는 자신의 기질에 꼭 들어맞는
자신의 생존 전략을 살아가며
부딪혀 보고 경험해 보며
충분히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
인간은 원래 완벽할 수 없는 모자란 존재임을 인정하고나자
나는 아이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아이가 소극적인 모습이 나타나든,
영악하지 못해 매번 손해보는 모습을 보이든,
자기주장도 못해 친구들에게 당하는 모습을 보여도,
또래와 어울리지 못하는 것처럼 보여도,
나는 아이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문제라 치부하지 않았다.
그저 아이가 속상해 할 때면 감싸주고 안아주었고
아이가 또래에게 다가가길 원치 않으면
그런데로 또 존중해 주었다.
그랬더니 아이는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물론 하루아침에 나타난 변화는 아니다.
2~3년에 걸쳐 조금씩 조금씩 아주 조금씩 변화했다.
가랑비에 옷 젖듯,
사실 나도 변화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조금씩 변화했기에 변화가 확 와닿지 않았다.
8세가 된 팔땡은 이제 친구들과 아주 잘 어울려 논다.
그냥 어울려 노는 것만이 아니다.
친구에게 먼저 다가가는 것도 쉽고,
심지어 처음 만나는 친구들에게도 잘 다가가
금방 친해지는 친화력까지 생겼다.
친구들을 리드하기도 하고,
때론 친구들의 뒤에서 서포트하며 밀어주기도 한다.
친구에게 배려도 양보도 잘 하지만
자신의 것을 무조건 빼앗기지도 않는다.
원하는 것은 당당하게 요구하고 주장할 줄도 알게 됐다.
지금은 팔땡에게 사회성 걱정은 전혀 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사회성 좋다는 말을 듣는 요즘이다.
팔땡이와 놀고 싶어 하는 친구들도 많이 있고
팔땡이 스스로도 자신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아주 많다고
스스로 느낄 정도로
아이는 정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친구의 엄마들이
자신의 아이에 대해 고민할 때
팔땡 역시 그런 시절이 있었다 말하면
모두들 놀랄 정도로
이젠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과거의 일이 되었다.
사실 나는 지난 3년간 아이에게 딱히 해준 것이 없다.
여전히 나는 아이에게 화를 내기도, 짜증을 내기도 한다.
이전보다 더 아이와 잘 놀아주지도 못했다.
이전보다도 더 거절도 많이 한 것 같다.
그럼에도 아이는 이전의 모습보다 훨씬 좋아진 모습으로 성장했다.
그저 아이를 믿었다.
부족한 모습이 있는 것이 아주 당연함을 받아들였고
그것을 감히 내가 고치려고 하지 않았다.
부족한 부분은 누구에게나 존재하기에
아이의 부족함이 불안하거나 걱정되지 않았다.
그러한 모습을 성장해가면서 스스로가 다룰 수 있게 될 것임을
아이의 힘으로 잘 헤쳐나갈 것임을 믿었다.
그랬더니 나의 걱정과 불안도
모두가 어느샌가 사라졌다.
엄마가 불안해하고 걱정하면
아무리 언어로서 표현하지 않아도 아이는 눈치챈다.
엄마가 아이를 그렇게 바라보면
아이 역시 그러한 심리적 역동을 눈치채고
자신을 그러한 아이라 치부한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사람과의 심리적 역동에서 반복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서도 이러한 역동을 끌어내는 에너지를 갖게 된다.
소심하고 소극적이고 예민하고 사회성이 부족한 아이를 키워보니
이제야 알 것 같다.
그것들은 전혀 문제가 아니었음을.
오히려 엄마가 그렇게 명명하는 순간,
아이는 정말 그러한 아이가 되어 버리고 만다.
믿고 기다려주면 된다.
다른거 다 필요없다.
엄마만 아이를 문제로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수용해주면
그리고 아이가 스스로 헤쳐나갈 힘이 충분함을 믿어주면
아이는 자신의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며
잘 살아나갈 수 있다.
혹여나 이 글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덧붙이자면
믿어준다고해서 사회성이 좋아지고,
소심함이 대범함으로 변화하는 일은 생기지 않을 수 있다.
여전히 사회성이 부족할지도 모르고
여전히 소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아이 스스로는 자신을 문제라 생각지 않고
아이는 그러한 자신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며
자신만의 방식대로 또 다른 생존 전략을 발달시키며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상담을 할 때에도 그러하다.
상담에서 문제행동을 제거하고 상담을 끝내는 경우보다
문제행동을 가졌음에도 그것을 수용하고 편안하게 받아들이게 되면
상담을 종결하게 되는 경우가 더 많이 있다.
문제행동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불편함을 경험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렇기에 아이를 키울 때에도
아이의 부족함을 고치려는 시도보다
부족한 자신의 모습을
부족하다 느끼지 않고
스스로가 편안하게 느끼며
그에 맞는 생존 전략을 스스로의 힘으로
키워 나가는 것이 온전한 육아이지 않을까.
나는 오늘도 아이의 모자람을 마주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을 문제라 여기지 않는다.
그저 아이의 하나의 특성이고
그러한 모자람을 가진 존재임에도
살아감에있어 전혀 문제가 없을 것임을
나는 믿는다.
그렇기에 더이상 걱정스럽지도, 불안하지도 않다.
부모가 해야 할 일은 딱 하나다.
아이를 믿고 기다려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