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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빈 Aug 01. 2023

오늘 나는 맘충이 되었다.


아이와 영화 바비를 보러갔다.

바비가 12세 이상이지만 선정적인 내용도 없고 부모 동반이면 12세 이하도 관람 가능하다기에 바비가 보고 싶다는 아이의 니즈에 따라 사전정보를 충분히 검토해보고 다녀왔다.


평소 아이는 인형을 좋아하기도 했고, 화려한 예고편에 마음을 빼앗겨 영화를 보고 싶어 했다.


그렇게 아이와 영화를 보러 갔고, 영화를 보며 선정적 장면이 없음에도 왜 12세 관람가인지 알 수가 있었다.

내용이 너무 어려움.

아무래도 페미니즘과 양성평등을 다룬 영화이다보니 12세 이하의 아동들이 이해하기는 쉽지가 않았고 단어도 아이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이 나온다.

예를 들면 '세뇌' 같은..


그래서 아이에게 설명을 하며 영화를 보게 되었고, 나름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게 속닥속닥 속삭이며 조용히 설명을 한다고 한건데, 영화가 끝나고서 아이 옆자리에 앉아있던 아가씨가 나가는 길에 구겨진 얼굴로 "저기요. 아이한테 설명해주시는건 좋은데 너무 시끄러웠어요. 다음부터는 조심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라고 내게 이야기를 했다.


나는 아차 싶어 곧바로 "어머 죄송해요. 소리가 그렇게 큰 줄 몰랐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라고 사과를 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어 시끄러운 음악이 나오던 때였어서 아이는 그 분과 내가 하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지만, 그 분이 나가고서 아이에게 분명하게 이야기 해주었다.

"엄마가 너한테 설명하는게 너무 시끄러웠대. 이건 엄마가 잘못한 일이 맞아. 엄마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거고, 저 분 뿐만 아니라 다른 주변 사람들도 피해를 입었을 것 같아. 진짜 죄송하다... 그래서 엄마가 죄송하다고 사과했어."


그렇게 나는 2시간 내내 맘충이 되어 있었다.

영화를 보는 중간에 말을 해주거나, 째려보기라도 하는 등 비언어적 눈치라도 좀 주셨으면 금세 알아차리고 아닥했을텐데ㅠㅠ 영화가 다 끝나고 알게되어 그 분께도, 다른 분께도 너무 죄송했다.


사실 그 분의 피드백에 가장 먼저 든 감정은 죄송함은 아니었다.

수치심, 적개심, 분노, 부끄러움이 가장 먼저 자동적으로 빠르게 올라왔고, 곧바로 미안함이 따라왔다.

비율로 따지자면 부정적 감정들 7과 미안한 감정 3정도...


사실 예전이었다면 나는 강렬한 부정적 감정들에 공격성을 드러내며 으르렁 거렸을 것이다.

예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아이가 두살때 문센을 다녔는데 그때 문센 입구에서 나오던 엄마를 기다리지 않고 굳이 꾸역꾸역 들어가다 나오던 엄마에게 한 소리를 들었었다.

"저기요. 안에 사람이 먼저 나가면 들어오세요."

뭐 앞뒤 맥락을 따지면 사실 내가 먼저 들어가고 있었고, 나는 나오려는 사람에게 양보를 하고서 이 분이 나오면 들어가려던 차였다. 그래서 두번째 사람이 나올땐 양보를 하지 않고 마구 들어간거였다. 굳이 따지자면 안과 밖이 한 사람씩 교대로 들어가는걸 생각하고 안에서 나오는 사람에게 양보를 했다가 나오자마자 내가 들어가던 차였다.

그리고 그때 그 분이 내게 저렇게 콕 집어 이야기를 하자 빡이쳐서 오히려 그 사람에게 상욕을 날렸다. (아.... 지난 날의 나 많이 미성숙했고 철딱서니 없었구나...... 반성....)


타인이 내게 지적을 하자 강한 반발심, 적개심, 공격성, 분노가 드러났고 그러한 감정들이 외현화되어 언행으로 표출되었다.


그때에 난 그러했다.

내가 잘못을 하고도 누군가가 지적을 하면 나를 돌아볼 줄 모르고 반성할 줄 몰랐다.

그저 내 기분이 더러우니 일단 공격적으로 으르렁 거리며 강하게 내 기분을 분출해 낼 뿐.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부정적 기분들이 가장 먼저 빠르게 올라오긴 했으나 우선적으로 기분을 인지해냈고, 내 기분에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상황을 판단하여 감정을 조절하여 사회적으로 용납될 만한 수준의 반응을 했다.


그리고 아이에게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성숙된 모습을 가르쳐주고자 설명을 해주었다.


사실 사과를 하고서도 나의 부정적 기분은 여전히 나아지진 않았다.

공격성과 적개심의 감정이 아니었다.

아주 깊숙이에 감정의 가장 원초적인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수치심때문에 기분이 영 좋지 않았고, 사과를 했음에도 똥을 덜 닦고 나온듯 영 찝찝한 맘이 들었다.


그리고 가만히 내 감정을 들여다 봤다.

보통 내담자들은 부정적 감정이 올라올 경우 회피하거나, 혹은 과도하게 매몰되거나 둘 중 하나로 고통을 경험한다.

그리고 이전의 난 부정적 감정이 올라오면 분노 폭발과 강한 적개심, 공격성을 드러내어 이 감정으로부터 벗어나곤 했던 것 같다.

결국은 나만의 부정적 감정을 회피하는 방식이었다.

얼핏보면 직면하여 강하게 싸워내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기분을 느끼지 않으려, 인정하지 않으려, 회피하려 드러내는 공격성이었다.


그리고 이번엔 가만히 수치심에 집중을 했다.

나는 누군가에게 지적을 받았다는 사실에도 수치스러웠고, 또 이 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피해를 주었을 것임에 더 수치스러워졌다.

그리고 가장 수치스러운건 내가 상식 밖의 행동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종종 중국인들을 욕하곤 했다.

무질서하고 사회적 규범이라곤 중요시되지 않는 중국 사람들을 해외에서 마주할 때면 인상이 찌푸려 지곤 했다.

공항에서 줄을 서지 않고 엉망으로 밀어붙이고, 컨베이어 밸트 위에 올라서는 모습을 보며 가히 충격적이었고, 공공 장소에서 큰 소리로 떠들고, 아이가 마구잡이로 식당을 뛰어 다니는 모습에도 그저 웃어 넘기고, 바닷가에서 성기를 노출한 채 놀고 있는 꽤나 큰 남자 어린이를 보고서도 경악을 금치 못했었다.

그러한 중국인을 보며 나는 무질서하고, 상식 밖의 행동을 하는 중국인들을 미개하다 여기며 수준 이하 라는 생각을 해 왔었다.

(물론 지금 이렇게 공개적으로 중국인들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이유는 현재 나의 행동으로 그들을 욕할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 나나 그들이나....;;;)


또한 예전 어린이집을 같이 다니던 엄마가 나는 맘충 소리 듣는거 상관없다, 내 새끼만 좋다면. 이라는 이야기를 했고, 당시 티는 내지 않았지만 헉 하는 마음으로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오늘의 나 역시도 맘충 역할을 제대로 해 버렸다.


아가씨때는 비행기에서 뒷 자리 아이가 비행 내내 발로 차는 것을 보고는 부모의 무대처에 화가 났었는데, 난 더한 부모가 되어 있었다.


평소 나는 장난기가 많고 아이와 장난치며 노는 것을 좋아해 나와 놀며 아이가 자지러지게 웃거나  행동이 커지는 경우가 생기는데, 공공장소에서 나때문에 아이의 목소리가 커지거나 아이의 행동이 커질때면 남편이 날더러 화를 버럭 내곤 했었다.

당시엔 내가 행동을 크게 한 것도, 내가 크게 웃은 것도 아니니 왜 아이보고 얘기안하고 널더러 얘기하는지 짜증도 나고 반발을 해왔는데, 이제야 남편이 지적하던 부분이 보이기 시작했다.


결론은 내가 한심하고 미개하다 생각했던 행동을 내가 했다는 사실과 남편에게도 무수히 지적받았던 행동들에 잘못을 인정하지 않다가 이제야 잘못을 직시하게 되어 상당한 수치심을 느꼈다.


이건 뭐 빼도 박도 못하는 맘충이었다..

아니 여기서 아이를 빼고 맘충이 아니더라도 그냥 나는 남들에게 피해를 끼친 상식 밖의 무식한 미개한 사람이 된 것이었다.

그렇게 수치심으로 반나절을 기분이 찝찝하고 부끄럽고 숨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이또한 잘 알고 있다.

과도한 죄책감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회개하고 반성할 줄 모르는 것 또한 문제가 되지만 지나치게 매몰되어 느껴야 할 수준보다 훨씬 과도한 죄책감과 수치심을 느끼는 것 또한 문제임을.


사실 나는 영화관에서 내가 조용히 말하는 줄 알았다.

영화가 워낙 시끄러웠기에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는줄 알고 나름 노력해서 소곤소곤 댄 것이었는데, 나의 청력은 주관적이다보니 스스로 객관적으로 데시벨의 정도를 알 수가 없었고, 나는 그것이 다른 이들에게 들리지 않을 것이라 착각하고서 두시간을 내리 아이에게 설명을 하고 있었다.

이는 의도적으로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기 위해 한 행동도 아니었고, 알고서 한 행동도 아니었다.


또한 내게 지적을 한 상대에게 최대한 정중하게 사과를 했고, 당시에는 3의 비율로 미안함을 느꼈지만 여러번 반추하며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분이 2시간동안 한번을 내게 눈치를 주지 않았다는 것은 정말 많이 참았다는 거고, 마지막에 나가면서 이야기를 했다는 것은 계속 고민하다 큰 용기를 내어 말한 것일 거라고.

또한 비행기에서 내내 내 등받이를 차던 아이에게 느꼈던 화와 유사한 감정을 그 분도 내게 느꼈을 거고, 얼마나 피해를 받고 거슬렸을지 그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수치심을 회피할 땐 보이지 않던 부분들이

수치심을 똑바로 바라보고 직면하자 모든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객관적 상황에 대한 판단부터 상대의 마음에 대한 공감까지도.


그리고 돌아보며 반성했다.

앞으로는 공공장소에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게 정말 조심해야겠노라고.


아이는 오늘 밤 잠들며 내게 말했다.

"엄마는 범생이같아. 다른 사람한테 모범적인 행동을 보여주잖아."

아이에겐 엄마의 실수보다도 실수 이후의 대처가 더욱 부각되어 보였던 것 같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고, 반성할 줄 아는 모습이 인상 깊었나 보다.


사실 이러한 행동이 상담사로서 내게 타격이 됨을 알고 있다. 이러한 글을 올린다는 것 자체가 상담사로서 인격적 성숙이 덜 이루어 졌다거나, 상담사로서 사회적 규범과 도덕적 윤리를 준수하지 않는 미성숙한 사람처럼 보여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담사라고 실수없이, 모든 도덕적 윤리와 사회적 규범을 칼같이 지키며 살지 못한다.

물론 그것을 지향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상담사이기 이전 인간인지라 나 역시 실수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상담사이기에 실수를 실수에서 끝내지 않는다. 내가 한 실수에 대해 회피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상황을 들여다 보고, 인정할건 인정하고, 사과할건 사과하고, 반성할건 반성한다. 그리고 실수가 반복되지 않도록, 내가 지향하는 가치를 상실하지 않도록 노력하고 나아간다.


나는 오늘 의도적으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다. (피해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면 바로 중단했을 것이다.)

대처 또한 정중히 사과를 하여 잘 마무리 했다.

이거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한 것이며, 적절한 수준의 수치심과 죄책감을 느낀 것이다.


이래서 인간에게 수치심은 꼭 필요한 감정인가 보다.

수치심을 느껴야 나의 잘못을 돌아볼 수 있고, 수치심을 느껴야 반성하고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나는 오늘 건강한 수치심을 느꼈다.

그리고 수치스러운 나를 직면하며 공공장소에서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과 함께   타인에 대해 함부로 평가하지 않아야 겠다는 또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


중국인이 미개하다, 맘충에 아무런 거리낌 없는 엄마가 이해가 안된다, 애 등받이를 차던 아이의 부모가 자격이 없다, 내게 공공장소에서 아이를 흥분시키지 말라던 남편이 소심하고 자의식 과잉이다 생각했던 지난 날의 나를 매우 반성한다.


누구든 실수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것이 모르고 한 실수든, 알고서 한 잘못이든 그들에게도 그들만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예컨데, 중국은 나라의 규모가 너무 크다보니 법이나 정부의 영향이 곳곳에 미치지 못하여 질서나 규범에 대한 관리가 우리나라만큼 쉽지 않고, 우리 나라 역시 규모가 상당했다면 유사한 문화를 공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맘충이란 말을 들어도 내 아들만 좋다면 괜찮다는 엄마도 그러한 생각을 하게 만든 어떠한 과거의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비행기에서 내 등받이를 차던 아이의 부모도 사실 좁디 좁은 비행기에서 아이를 100프로 통제하기란 쉽지 않은 상황이고, 아무리 훈육을 해도 어린 아이가 발을 반복적으로 반사적으로 차는 것이 아이 스스로도 통제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모든 피해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싸잡아 미개하다,한심하다, 혐오스럽다, 경악스럽다, 상식 밖이다, 수준 이하다 라는 말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나 역시 그것밖에 안되는 사람이지 않았나 싶다.

나나 그들이나 알게 모르게 상식 밖의 행동을 하며 타인에게 피해를 주기도 하고 실수와 미성숙한 행동을 저지르게 된다.

그리고 인간은 알게 모르게 타인이게 피해를 줄 수 밖에 없는 존재이고, 실수하는 존재이기에 여기에 대해 수용하고 인정하는 것 또한 필요하다.

다만 이것을 어떻게 돌아보고 어떻게 반성하고 어떻게 수정하고 어떻게 나아갈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후행된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내게 시끄럽다 지적한 그 분 덕에 오늘도 또 하나를 깨닫는다.

그 분이 말해주지 않았음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다음에 또 아이와 열심히 떠들며 영화를 보았을 것 같다.


나의 수치심에 직면하고나니 반성을 넘어 깨달음과 감사함까지 느끼게 된다.


나는 오늘 적절한 수준의 수치심을 느꼈고, 그것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함으로서 제대로된 반성을 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다시금 경각심을 갖고 설정했다. 또한 지금껏 부정적 감정을 다루기 위한 나의 방어전략이었던 남 탓, 합리화, 회피에 대해서도 제대로 직면하고 깨달아 늘 해오던 자동적, 반사적이었던 방어적 행동 레파토리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 방법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또한 적절한 대처를 함으로서 타인도, 나도 모두가 편안함을 찾을 수 있었고, 이것을 바라보는 아이 역시 나를 통해 잘못에 대해 건강하고 적절한 대처를 모델링할 수 있었다.


처음엔 수치심으로 시작되었던 나의 감정이, 뿌듯하고 대견한 맘으로 종결될 수 있었다.

이로서 나는 오늘도 한뼘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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