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이의 아픔은 아이러니하게도 고통과 감사를 동시에 가지고 온다.
나는 하루 종일 신경이 쓰여 머릿 속에 온통 그 생각 뿐이다.
해야 할 일은 산더미인데 마치 내 몸과 정신과 마음이 해체된 것 마냥 모두 조각조각 나서 허공을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다.
마치 중력이 없는 우주에 둥둥 떠 있어 조금만 움직이면, 누군가가 조금만 스쳐도 흩어질 듯하여 움직임도 조심스러울 지경이랄까.
굉장히 무기력하고 슬프고 멍하다.
평소라면 퇴근해온 자신에게 집안일 일부가 전달되는 것을 싫어하던 남편도 나의 상태를 아는지 무기력한 내가 도움을 청하자 이것저것 군말없이 돕는다.
크게 언어적인 위로는 하지 않지만 행동에서 위로가 느껴진다.
쓰레기를 분리수거 해주고,
아이를 씻기고,
아이의 언어치료 과제를 돕고,
계획되어 있던 가족여행 티켓들을 조용히 취소해주고,
할머니 집에 가자는 갑작스런 부탁에도 흔쾌히 오케이를 한다.
혼자였다면 마냥 무기력해져 널부러져 있었을텐데, 남편의 존재가 이렇게 든든하게 와닿은 적이 없다.
내가 무너지지 않도록 나의 것을 티나지 않게 조금씩 나누어가져주는 느낌이다.
그것이 일이 됐든, 슬픔이 되었든.
새삼 남편에게 감사해졌다.
나는 엄마가 무너질까 가장 걱정이었다.
엄마는 담담했다.
어쩔 수 있냐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늘 그렇듯 생활력 강하고 씩씩한 모습이었지만 그 이면의 연약한 엄마를 나는 알고 있다.
수시로 전화해 밥을 먹는지 체크했지만 역시나 밥이 먹히지 않아 달걀 하나 겨우 먹었다고 한다.
엄마가 아프면 안된다고 무어라도 억지로 먹으라 하면서 나 역시 잘 먹히지 않아 식사량이 훅 줄었다.
당사자는 얼마나 속이 상할까.
자신으로 인해 주변 가족들이 계속해서 피해를 받고 있다 느끼시는지, 앞으로 피해를 줄거라 생각하시는지 한사코 서울쪽 병원행을 거절하신다.
병원을 라이딩해야 하는 이들에게 혼자하겠다고, 내려와서 함께 살자는 가족에게도 싫다며 버럭버럭 역정을 내신다.
나는 그녀가 몹시 가여워졌다.
그녀의 인생 스토리는 어른들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 대강은 알고 있었지만 그 가여움이 이리도 절실히 다가온 적은 없었다.
그녀는 평생을 가족을 위해 희생했다.
딸만 많은 집의 장녀로 태어나 찢어지게 가난했던 가정을 책임져야 하기에 팔려가다시피 어린 나이에 강제로 시집을 갔다.
동네에서 이름만 대면 알 정도로, 집에 거느리는 일꾼들이 아주 많은, 일꾼의 처소들까지 별채로 마련되어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집이었다.
그러한 집에서 세남매를 낳았다.
하지만 남편은 퍽하면 술을 먹고 들어와 폭력을 행사했고, 외도와 도박을 일삼았다.
돈이 넘치도록 많아 몇대가 쓰고도 남을 정도의 돈은 도박 앞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아버지가, 그 의 아버지가 이룬 부는 한순간에 허상이었던 것마냥 사라졌다.
폭력으로부터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남편이 술을 먹고 들어올 때면 옆 집에 아이들을 피신시키는게 일상이었다.
아이들은 옆 집에서 맞고만 있는 엄마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엄마는 아이들을 지켜내기 위해 온 몸을 희생했다.
그러다 남편은 어느순간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갔고, 소식이 두절되었던 것 같다.
그것은 그들에게 평화와 함께 두려움도 함께 가지고 왔을 것이다.
덩그러니 남아버린 가난한 집의 세 남매와 엄마.
그렇게 아이들을 책임지기 위해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일했다.
그녀는 여전히 어느 건물을 청소한다.
나이 일흔 여섯이 되도록 한 번을 쉬어본 적이 없다.
어쩌면 청소하다 매일같이 들이마시던 락스로 인한 질병일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우리가 방문할 때면 늘 본인이 건물 청소를 위해 쟁여둔 락스를 꺼내며 필요하면 가져가라고 말했다.
그녀는 남편없이 어린 세 남매를 키워냈다.
찢어지게 가난한 자신의 부모를 대신해 장녀로서 가정을 책임졌다.
그러다 자식들 역시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 시집을 가서 돈벌이에 뛰어들어야 했기에 손주들을 모두 거두어 들인다.
손주 하나를 키워놓으면 또 다른 손주를 책임져야 했다.
자식들의 삶에도 가난이 드리웠다.
그녀는 번 돈의 대부분을 모아두었다 한 번씩 자식들에게 턱턱 내놓았다.
자신은 아끼고 아끼고 단 돈 10만원, 20만원으로 생활하면서는 자식들에게 억대의 돈을 턱턱 내놓았다.
꼴랑 고령연금 일이십으로도 자신은 충분히 살 수 있다며 모든 돈을 자식에게 헌납하려 하신다.
그러다 노모까지 연로하셔서 그녀는 일흔이 넘도록 안 들리고, 걷지 못하는 노모를 모시며 살았다.
매번 노모를 모시는 일이 아무렇지 않은 듯, 힘들지 않다는 듯 거뜬히 해내면서도 정작 그녀의 딸이 시모를 모시겠다는 선언에 펄쩍 뛰며 노모를 모시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딸을 위해 그제야 털어놓으신다.
그녀는 평생을 일만 했다.
그 일한 돈으로 자신은 허름하게 살아도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그럼에도 더 해주지 못함에 가슴 아파했다.
10대 때는 팔려가다시피 시집을 갔고,
20대 때는 폭력적인 남편으로부터 가정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살았다.
30대에는 집안의 가장이 되어 세 아이를 먹여 살리느라 바빴다.
40대에 자녀들을 출가시켰지만, 역시나 똑같이 힘든 삶을 꾸리는 자녀들을 위해 손주들을 봐주느라 세월을 다 보냈다.
50대가 되어서는 자식의 이혼과 재혼에 꽤나 커버린 손주들을 거두어 들여 홀로 아이들을 키워 내셨다.
60대가 되어 손주들에게 벗어나자 연로한 노모가 찾아온다.
70대가 되어 노모의 장례를 치르고서 이제야 좀 편해지나 싶었는데 암을 선고 받았다.
나는 그녀가 너무나 가엽다.
그녀의 삶이 너무나 기구하여 눈물이 난다.
하지만 그녀는 현재까지도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손주들에게, 형제들에게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아 모든 케어를 한사코 거절하신다.
사람들은 하루라도 더 살고 싶어 가장 좋은 병원을 찾아, 그 분야의 최고의 권위자를 찾아 어떻게든 살아보려 애쓰는데 그녀는 혼자 다닐 수 있는 가까운 병원을 원한다.
나는 한 평생 희생이 몸에 배어 이 순간까지도 자신이 가장 뒷전인 그녀가 안타깝고 속상하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하늘은 그녀에게 평생 남을 위해 희생만 하고 가라고 그녀를 존재하게 했나..
그녀는 가난한 딸부잣집 장녀로 태어나 억척같은 인생을 살아내느라 감정을 표현할 줄 몰랐다.
반가워도, 즐거워도, 행복해도, 슬퍼도, 아파도, 속상해도 모든 감정을 역정을 내며 버럭하고 표현하곤 했다.
몇년 전, 엄마가 아팠을 때도 그녀는 내게 전화를 해서는 화를 버럭 내고는 눈물을 들킬 새라 황급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내가 용돈을 드리면 니 살림에나 보태지 왜 자신까지 챙기냐고 화를 버럭 내며, 내 용돈보다 더 많은 돈을 내어 놓았다.
안부전화를 드리면 뭔 나까지 신경쓰냐며 버럭 소리치고는 끊을 때 자그마한 목소리로 전화줘서 고맙다고 한다.
그녀는 수술이 불가할 수도 있다는 의사에게 수술을 못하면 그냥 죽어야 하냐고 버럭 소리를 쳤다고 한다.
가장 좋은 병원을 예약하여 손주가 모시고 다니겠다니 버럭 화를 내시며 가장 가까운 거리의 병원이면 된다고 한다.
자식들이 이젠 모시겠다는 말에 버럭 역정을 내신다.
사실은 자신이 가장 고통스럽고 괴로울텐데, 마음이 썩어 문드러질텐데, 걱정하는 이들에게 아무렇지 않은듯 덤덤하게 신경쓰지 말라 전한다.
나는 그런 외할머니가 너무나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