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라는 국제적인 감염병의 창궐로 내가 근무하고 있는 지자체는 업무량이 폭증해 일손이 심각한 수준으로 부족했다. 이에 작년 한 해 신규 공무원들을 굉장히 많이 채용했는데 그중 조직에 쉽게 적응하지 못해 현재 힘들어하고 있을 그들을 위해 약간의 꼰대 계급(?)이 된 지금의 내가 햇병아리 공무원이던 그때를 떠올리며 심심한 위로를 표하고자 한다.
더불어 공무원의 길을 준비하고자 하는 공시생들과, 합격 후 임용을 기다리며 두근거릴 예비 공무원들에게도 조금이나마 참고가 되었으면 한다.
이야기를 시작하며
대기업 회사원으로 근무하며 그 안에 나를 갈아 넣다가 스스로의 한계를 느끼고 과감히 퇴사, 노력 끝에 20대 끝자락에 지방직 공무원이 되었다.
합격과 임용의 기쁨도 잠시, 행복했던 감정은 근무를 시작하며 여러 장애물에 부딪혔고 그것은 곧 '내가 생각했던 공직생활은 이게 아닌데..'라는 당황스러움과 슬픔으로 바뀌게 되었다.
오늘은 슬픔이 많았던 그때를 회상하며 사기업에 몸담고 있다가 공무원이 된 어설픈 햇병아리 시절 이야기를 풀어본다.
※ 자극적 소재는 현실에 맞게 각색하였습니다. ※ 개인적 경험에 의존한 내용이므로 특정 직업군에 대해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 신규공직자의 입장에서 쓴 글이므로 동료 및 선후배 공직자의 입장에서는 다소 불편할 수 있습니다. ※ 대기업 근무 썰은 지금으로부터 10년도 더 지났기에 현재 시스템과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1. 신규공무원?(X) 담당자?(O)
사기업에서는 입사하기 전 신입 OT를 통하여 애사심과 동료애를 키웠다.(라고 쓰고 세뇌라고 읽는다.) 여기에 대략적인 업무 숙지까지 마치고 출근을 했고(하잘것없는 스펙으로 들어왔지만 나는 무려 동기중 최종평가 1등으로 입사했다.) 근무를 시작할 때에도 신규임을 감안하여 해낼법한 일을 주었기에 내가 열심히만 하면 해결할 수 있는 일과 인간관계 속에 있었다.
공직에 처음 들어와서 가장 당혹스러웠던 것 중의 하나가 오늘 첫 임용인 나는 '신규공무원'이 아니라 '담당주무관'이라는 사실이었다.
내가 발령받은 팀은 당시 그 부서에서 가장 바쁜 곳이었다. 계절에 민감한 이슈가 있어 민원전화가 폭발한 시기였던 데다가, 바로 전 담당자가 진급을 하며 타 부서로 전보를 가 일주일 정도 비어있었던 자리였기에 다들 다음 담당자가 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임용 첫날 쑥스러워하며 "안녕하십니까. OOO입니다."라고 동료들에게 나를 제대로 소개할 틈도 없이 바로 말석을 지정받아 앉았다. 그나마 팀에서 근무 첫날이라 끊임없이 오는 민원전화를 받지 않도록 해주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 냉정했던 동료들에게 정말 엄청난 배려를 받았던 것임을 새삼 느낀다.
신규자 교육은 간데없고 본격적인 업무는 바로 다음날부터 시작되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신규공직자인 내가 '이거 왜 안 해줍니까?!'라고 화를 내는 민원인에게 '제가 신규공무원이라 어떻게 당신의 민원을 해결해야 하는지 도통 모르겠네요.'라고 말할 수 없음이 참 답답하고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웠다.
팀원들도 참 냉정했다. 이제 이틀 차 신규가 뭘 안다고 담당자가 나라며 모든 전화를 다 나에게 바꿔주는지. 물론 그들은 담당자가 아니기에 담당자인 '나'에게 민원을 연결해 주는 건 당연했지만 미친 듯이 화를 내는 민원인들의 늪에 이 햇병아리를 던져버리는 것은 정말 너무했다.
나는 임용된 후 바로 '담당주무관'이 되어 출장(담당은 나 혼자고 다들 바빠 외지 출장도 나 혼자 갔다.)부터 과태료 부과와 행정명령 청구, 예산 사용, 전임자가 벌려놓은 일 수습, 막내로서의 잡무까지 해야 하는 슈퍼 초 울트라 그랜드 마스터 공무원이 되어야 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나를 챙겨주던 서무 주사님의 배려로 4주간의 신규자 교육을 겨우 신청해 다녀올 수 있었다. 이래서 신규 받으면 안 된다고 툴툴대는 동료들의 눈총을 한껏 받으면서 말이다.
지금도 가끔 생각이 난다. 저녁 늦게까지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는 일들을 붙들고 있다가 퇴근하는 버스 안 창문에 머리를 기대어 소리 없이 눈물울 훔치던 가여운 내 모습이.
2. 한 시간 내지는 반나절이면 끝인 인수인계
사기업에서는 선배나 전임자에게 일대일 밀착 강의로 최소 일주일은 업무를 배울 수 있었다. 알려주는 자들의 태도도 굉장히 친절하고 깔끔하다. 자신만의 업무 노하우를 알려 주는 것도 자신 있고 거리낌이 없다.
그렇게 배운 탓에 나는 회사를 그만둘 적에나 공무원이 된 지금이나, 남에게 참견하고 알려주는 것을 상당히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공무원의 인수인계는 꽤나 특이하다. 법을 근거하여 집행하는 직무를 수행함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철저하지 못한 인수인계를 한다. 시스템에 명목상으로 인계, 인수를 입력하나 별 의미가 없다. 실제 인수인계는 보통 발령 첫날 전임자가 와서 알려주는데 거의 대부분 한두 시간이면 끝난다. 업무 난이도가 조금 있다면 반나절 정도 한다. 제대로 된 매뉴얼이 있다면 다행이고.
이렇게 인계가 끝나면 온전히 업무는 나의 몫이 된다. 신규공무원은 전임자에게 물어보아야 하는 일이 반드시 생기는데 알려주고 간 사람은 이제 내 업무가 아니기에 귀찮은 듯 답변한다. 모르는 사람의 입장에서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입장에서 알려주기에 알아듣기도 어려운데 두번 물어보기가 어쩐지 더 껄끄럽다. 몇 번 물어보다가 그만두고 어떻게든 해내기 위해 노력해본다.
일방적인 인수인계가 끝나고 나면 담당이 된 업무를 완벽하게 수행하기보다는 찜찜한 기분을 더해 하루하루를 땜질하는 느낌으로 업무를 맡게 된다.
3. 올라갈수록 업무가 가벼워지는 직급체계
사기업 근무 당시 상사들은(간부나 임원급) 주말에도 출근하는 것이 당연했다. 주말 출근해 사내 메신저를 켜보면 임원들은 가정을 버리고 항상 출근해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어떤 간부는 쓰러지면서까지 미친 듯 업무에 몰입했다.
잘 보이기 위한 상사와의 회식, 부서를 독려하기 위한 직원 회식도 잦았다.그 당시 신규였던 나의 별명은 '두주불사'였다. 그 소모적인 별명은 나 스스로를 더욱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도록 해주었다.(지금은 술자리 내빼기 선수다.)
사기업은 개인과 조직의 성과 위주이기에 정말 자신을 갈아 넣어야 위로 올라가 살아남을 수 있는 시스템이다. 진급할수록 직급에는 책임과 성과목표의 무게가 더해졌기에 그만큼의 고통이 수반되었다.
공무원은 조금 다르다. 지방 공조직 한 부서는 몇 개의 팀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보통 부서의 장은 5급 사무관, 팀장은 6급 주사, 팀원들은 7~9급 주무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6급 팀장이 되기 전까지 적지 않은 시간을 팀원으로서 업무를 수행하게 되는데 막내인 9급부터 팀의 차석(팀장 다음) 격인 7급으로 진급할 때까지 어렵거나 양이 많은 업무는 아래 직급 위주로 배정된다. 그래서 8급, 9급 때에는 정말 견디기 힘든 시기가 많다. 물론 막내 때보다 덜 하다는 것이지 덩어리가 크고 비중 있는 업무는 7급이 하기에 일 많이 하기는 마찬가지다.
공직은 위로 올라갈수록 직급에 따른 결정권을 가진 결재권자로의 기능이 강화되어 있다.(이 정도면 5급, 6급 직무 설명은 충분하다.) 물론 공직사회는 계속 변화하고 있기에 내가 팀장이 될 즈음이면 팀장들도 실무관들과 함께 가열차게 업무를 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나는 평생에 일복이 많은 사람이니까.)
4. 폐쇄적인 만큼 관대한 조직
이번은 조금지저분한 이야기를 꺼내보겠다. 회사에 근무할 때 아는 사람만 알고 조용히 지나간 불륜 일화가 있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회사에 안보이기 시작한 두 사람이 있었는데 유부남 상사와 미혼 여후배(나에게는 선배)가 그렇고 그런 사이로 지내다가 남자 상사의 와이프에게 발각되어 회사 윗선까지 알려져 둘 다 조용히 퇴사했다는 이야기였다.
사기업은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일이나 범죄에 민감하게 대응하기에 그 즉시 싹을 잘라내어 버린다.빈자리를 또 다른 구성품으로 채우는 것 또한 그리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공무원은 어떠한가? 공조직은 폐쇄적이다. 담당자가 감수성을 갖고 업무를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법령으로 위임받은 사무를 이행하는 계급제조직이기에 안타깝게도 보수적이고 폐쇄적일 수밖에 없다.
이에 따른 부작용 중 하나가 조직 내 비위에 단단하지 않은 분위기이다. 법률 위반사항이 발생되면 해당 기관의 기준에 맞게 강경하게 징계 처리한다고는 하나 음주나 성비위에도 강등, 정직, 감봉 등의 징계를 주는 것으로 마무리되며, 애석하게도 이러한 징계는 관련 규정에 따른 적절한 수준인 것이다. 그들도 딱히 부끄러움 없이 당당히 공직생활을 이어간다.
썰을 마치며
위와 같은 다름으로 상당한 이질감을 느꼈는데도 아직 조직에 남아있는 것을 보면 나에게는 공노비가 어느 정도 적성에 맞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씁쓸하다.
이곳을 바라보며많은 사람들이공무원을 일하지 않는 철밥통이라 비난한다. 반면에 가족 누군가가 공무원이 되면 좋을 것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이중적이지만 현실을 반영하면 그만큼 매력 있는 직업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막연하게 편할 것만 같은 생각을 품고 누구나 들어오지만, 막상 현직에 종사하다 보면 여유와 휴식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공직에 입문하려면 녹록지 않은 현실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단순한 직업생활로 공무원을 선택하기에는 그 만으로는 버틸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이야기가 길어지므로 다른 글에서 다루어 보기로 한다.) 이미 나의 선후배들과 동기들 중 의원면직자와 타기관 전보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 그 증거가 아닐까.
너무 빨리 이곳에 뛰어들지 말라.요즘 사람들은 잠재된 능력이 무궁무진하고학식이 깊은 만큼 자유로이 헤엄칠 수 있다.공무원이 아닌 다른 길을 우선 가보기를 바란다. 만약 내가 간 그 길이 아니라면 그 재서야 조금 돌아 한번쯤와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