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얼숲 Oct 11. 2023

그 할머니에게 시장은 놀이터였다

전통시장 분투기

평일 낮 제천 중앙시장을 찾았다. 전통 시장의 보존과 관련된 취재를 하던 중이었다. 발칙한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시대가 변하면, 어쩔 수 없이 사회도 변하는 거 아닌가? 전통시장이라고 꼭 보존하란 법이 어딨지?’ 냉정하게 생각할수록 맞는 말이었다. 깔끔한 마트와 편리한 인터넷 쇼핑을 두고 전통시장이 남아있을 이유는 없어 보였다. 내 눈으로 전통시장의 현재를 보고 싶었다.


시장 근처 왕복 4차선 도로. 가장자리는 주차된 차들로 가득했다. 시장 안쪽에 마련된 주차장에 차를 댔다. 시장 안엔 옷 가게들이 즐비했다. 손님은 거의 없었다. 가게를 지나칠 때마다 안을 들여다봤다. 주인들은 하나같이 스마트폰을 하고 있었다. 더러 있던 손님들은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들이었다.


온통 할머니들뿐인 시장을 둘러보다 지하로 내려갔다. 군데군데 비어 있는 점포에 볼 건 다 봤다 싶은 찰나, 작은 식당을 지나쳤다. 주인으로 보이는 할머니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간판을 보니 거북식당이었다. 사람이 없어 모든 게 느린 시장인데, 홀로 바삐 움직이는 가게 주인이라니, 심지어 가게 이름은 느림의 대명사 거북이었다. 이질적은 모습에 그날 점심을 ‘거북식당’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머리를 숙이며 가게로 들어갔다. 입구부터 주방의 진열대까지 가게는 모든 게 낮았다. 내 가슴까지밖에 안 오는 작은 체구의 주인에 맞춰져 있었다. 할머니는 노란색 긴팔 티셔츠에 남색 앞치마를 입고 있었다. 색이 바래 ‘배달모아’라는 글자가 거의 지워져 있었다. 나는 김치찌개를 주문했다. 붉은 보랏빛이 감도는 파마머리의 할머니는 내 주문을 받고는 곧장 가스 불을 켜고 음식을 시작했다. 


음식을 하면서 할머니는 앉아 있던 다른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가게에 모기가 있는데 아직 잡지 못했다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부터 며칠 전 감기에 걸려 동네 병원에 갔다가 코로나 진단을 받았다는 이야기까지, 전통시장의 이미지와 어울리는 이야기였다. 


할머니의 왼쪽 손목엔 손가락 반 마디쯤 되는 금팔찌가 있었다. 금팔찌는 락앤락 통으로 향했다. 할머니는 김치를 꺼냈고 뚝배기에 넣었다. 이제 막 끓기 시작한 김치찌개 옆엔 뚝배기 알밥 두 개가 있었다. 곧이어 뚝배기 알밥은 장판에 앉은 손님들로 향했다. 식사를 건네는 할머니의 옷엔 김칫국물 자국이 띄엄띄엄 묻어있었다. 분주하게 보낸 점심시간의 흔적이었다. 


옆자리에 앉은 다른 손님이 식사를 마쳤다. 만 원을 건네자, 할머니는 왼쪽 바지 주머니에서 거스름돈 뭉치를 꺼냈다. 천 원짜리 한 장이 여러 장의 천 원을 묶고 있었다. 막 3,000원을 거슬러주려는데, 옆에서 알밥을 먹던 손님이 외쳤다. 

“모기 잡았다!”

돌아보는 할머니의 눈은 반달처럼 그려졌다. 깊고 얕게 패인 주름들 사이로 부드러운 미소가 드리워졌다. 


기억을 더듬어 7살 때가 떠올랐다. 부모님은 작은 시장 안에서 그릇 가게를 했다. 어린 내게 부모님의 가게는 괜찮은 놀이터였다. 용도별로 다른 그릇과 식기구들을 보고 있으면, 혼자 있어도 심심할 틈이 없었다. 그릇을 건물 삼기도 하고, 인물처럼 상상하기도 했다. 가게는 놀이터였고, 그릇은 장난감이었다. 


지난여름 찾은 나의 오랜 놀이터에는 할머니들이 앉아 있었다. 등은 굽어 있어 작고 둥그렜다. 할머니들은 무언갈 사진 않았다. 잠시 길을 가는 중에 가게를 들렀고, 엄마와 함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는 게 다였다. 나의 놀이터였던 가게는 그들의 놀이터가 돼 있었다. 


모기 잡은 일에 웃고 이야기 나누는 거북식당의 모습에서 나의 놀이터가 떠올랐다. 이들에게 시장은 물건 사고 밥 먹는 곳에 그치는 게 아니었다.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 사람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는 공간이었다. 알밥과 김치찌개는 장난감이었고 거북식당은 오랜 시간 제천 중앙시장과 함께해 온 이들의 작은 놀이터였다. 


계산하며 주인 할머니께 물었다. 

“여기 이름은 왜 ‘거북 식당’이에요?”

“식당 이름? 그야 내가 거북이처럼 뒤뚱뒤뚱 걸으니까!”

“여기서 오래 하셨어요?”

“35년! 이제 그냥 안 해도 되는데, 그냥 이렇게 나와서 열심히 일하면서 사람들하고 놉니다! 하하하”

누군가의 오랜 놀이터에서 함께 한 순간, 발칙했던 내 의문도 조금은 풀리고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시장 바닥을 돌아다니는 기자 명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