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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얼숲 Oct 15. 2023

아우디 타고 필기시험 보러 간 날

잡글 01

잡글이다. 


작은누나가 얼마 전 차를 바꿨다. 폭스바겐이었다. 작은매형의 차는 아우디고, 지난해 아빠가 바꾼 차가 BMW니 벤츠만 있으면 독일 자동차사 4개가 다 모인다. 드래곤볼을 모으면 소원이 이뤄진다는데, 독일 자동차 4개 사가 다 모이면 무슨 일이 벌어지려나?


이건 자동차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부끄러움에 관한 이야기다. 며칠 전 방송사 필기시험을 봤다. 서울에서 치는 오전 시험이라 전날 고양에 사는 누나네서 하루 신세를 졌다. 버스와 지하철을 타도 되는데 누나도 볼일이 있으니 차를 태워주겠다고 했다. 비도 오니 편하고 좋았다. 차를 탔다. 부드러운 시동과 편안한 주행. 상암으로 향하는 길은 너무 편했다.


비슷하지만 정반대의 상황이 떠올랐다. 내 기억 속에 여전히 자리 잡고 있는 중학교 때의 일이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일 때 아빠는 포터를 샀다. 이삿짐을 하기 위해서였다. 자식 셋, 교육비와 생활비. 그릇 가게만으로는 안 됐다. 중학교는 걸어가는 거리가 아니었다. 종종 통학버스를 놓치곤 했다. 그때 아빠가 차를 태워줬다. 


13년 전의 나는 아빠의 트럭이 부끄러웠다. 일부러 정문에서 먼 곳에 내려달라고 졸랐다. 아빠도 그걸 몰랐을 리 없다. 지금 그 녀석을 본다면, 진짜 몇 대 패주고 싶다. 그땐 나를 때릴 누나나 형이 없었다. 정신이 번쩍 들게 혼났어야 했는데... 물론 그때도 그게 아빠한테 못된 짓인 줄은 알았다. 그 짓이 부끄러운 줄은 알면서 친구들의 시선이 더 신경 쓰였다. 


상암으로 향하는 아우디 안에서 다른 이유로 그때와 같은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세상의 높고 낮음을 본다. 사실과 맥락을 전한다. 그로 인해 알게 되는 진실을... 다 모르겠다. 언론인으로서의 자세와 생각을 다 집어치웠다. 그냥 지금의 내 모습만 봤다. 외제차 아우디에서 내리며 편하게 방송사 필기시험 보러 가는 20대 후반의 남성. 내 과거가 뭐든 나의 지금은 두말할 것 없는 중산층이었다.


누군가는 시험 장소 근처 모텔에서 하루를 묵었을 테다. 비를 맞으며 걸었을 테고, 꿉꿉한 지하철을 탔을 테다. 서울에 살지 않으면, 멀게는 부산이나 광주에서 왔을 거고 수도권에 산다면 새벽 일찍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서민인지 중산층인지 부유층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같은 꿈을 갖고 있는 그들의 노고에 비해 나는 내 노력의 무엇도 없이, 운 좋게 편함을 누리고 있는 것 아닌가. 


뭐, 물론 나도 광주에 시험 보러 갔을 땐 모텔에서 잤다. 불편한 잠자리에 버스와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냉정히 따지면 이번 한 번이 운이 좋았던 것뿐이기도 하다. 그래도 부끄러워야 한다. 누군가에겐 그런 운이 찾아올 기회가 아예 없을지도 모르니까.


외제차를 산 건 아빠의, 누나의, 매형의 잘못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여력이 되는데 안 살 이유도 없다. 그냥 그 순간 내 마음이 그랬다. 이게 지독히도 자신을 탓하려는 내 모나고 못난 성격 때문 일진 모르겠다. 운 좋게 누리는 편리함을 어느 순간 당연한 것으로 여길까 내심 두려웠다. 나의 부모와 형제와 내 주변이 나에게 준 환경과 선물에 감사하지만, 결단코 내 것이라고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 어떤 것도 거기에 내 건 없다. 


가난을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 마찬가지로 부유함을 떠벌리고 다닐 필요도 없다. 빈부의 격차보다 겸손의 격차를 알고 느끼는 인간이 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지금 마주한 모든 상황과 현실은 순전히 내 노력만으로 된 게 없다. 인간의 환경과 배경은 그 사람의 선택을 좌지우지하니까. 잡글을 마치는 지금, 반골 기질인 언론학도의 마음속에 생각이 피어오른다. 

'절대 벤츠는 안 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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