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wovewove Oct 05. 2020

The cat girl.

<2018, 미완성>

1.

 그녀는 이미 온점이 찍힌 일이라고 여겼다. 남은 것은 오로지 그늘 안에서 쉴 것인지 헤맬 것인지를 두고 선택하는 길밖에 없다고. 그렇지만 그녀는 절망에 빠지지도 않았다. 인생은 어차피 덧없는 굴레라는 걸 미리 깨달았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를 보고 유치하고 섣부른 소리라고 하겠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인생에서 그 판단은 조금도 틀림이 없어 보였다.

2.

 어제의 마지막 수업은 역사 시간이었다. 재스민은 칠판 대신 선생님의 얼굴을 관찰하며 시간을 보냈다. 역사를 가르치는 진저 선생님은 근사한 얼굴의 소유자였다. 수수한 차림으로 숨기고 있어 눈에 띄진 않았지만 재스민은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그녀가 멋진 눈썹과 광대뼈를 철 지난 뱅헤어로 감추어 허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진 것을 허투루 쓰는 사람들을 보며 애석해하는 일은 재스민의 소일거리 중 하나였다.

 이내 수업이 끝나는 종소리가 울렸다. 그녀는 선생님에 대한 잡상은 관두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원래 같으면 친구들과 어울리다 저녁 늦게 집으로 갔을 테지만 어제는 그럴 생각이 안 들었다. 그녀의 부모님이 여행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열흘 뒤에나 돌아오리라. 그녀는 부모님을 아주 사랑했지만 고등학생이 된 후로는 자주 성가셔했다. 그래서 이따금 찾아오는 혼자만의 밤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3.

 창문으로 얼핏 본 집에는 불이 모두 꺼져 있었다. 그녀는 달뜬 기분으로 문을 열었다. 현관에서부터 아무도 없는 공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방마다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고는 소파에 앉았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재스민은 확인하지 않고서는 무엇도 믿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자신만의 완벽한 어둠을 이룰 수 있었다. 유난히 고요하고 검은 밤이었다.

 목욕을 마친 그녀는 빗질을 하기 시작했다. 티를 내진 않았지만 탐스럽고 풍성한 머리칼은 그녀의 자랑이었다. 갸르릉 하고 여유로운 신음을 내며 위에서 아래로 쓸어내리는 행동을 반복했다. 한동안 그러더니 이내 불을 끄고 누웠다. 협탁에 둔 초를 살짝 피웠다가 그마저도 금세 치워버렸다. 얼마 전부터 그녀는 작은 빛에도 피로를 느끼던 찰나였다. 그녀는 허공에 대고 잠깐 투덜거렸다.

“ 요즘은 눈 부신 일 투성이야. 휴대폰만 붙들고 있어도 피곤해진다니까. “

 그녀는 사락거리는 침대에 누워 어둠을 덮고 푹신함을 만끽했다. 모처럼 만에의 만족감에 잠을 설칠 지경이었다. 눈을 감아도 떠도 그대로 어두웠다. 눈을 뜨고 잘 수도 있겠다는 엉뚱한 생각까지 들 무렵이었다.

 그런데 불이 켜진 것이다.

 장난스레 꿈벅거리던 눈이 번뜩 녹색 빛을 감지했다. 처음에 그녀는 휴대폰 화면이 잠시 켜진 줄 알았다. 하지만 휴대폰은 여전히 자고 있었다. 방에 있는 모든 게 그대로였다.

 빛을 내는 것은 다름 아닌 재스민의 두 눈이었다. 그 빛은 그녀의 시선을 따라 직선으로 일렁이었다.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가위에 눌린 것처럼 온몸이 얼어붙어서 거울을 보려고 일어나는데 한참이나 애를 먹었다. 어렵게 마주한 거울에는 눈에서 나오는 빛줄기가 번지는 바람에 그녀는 얼굴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이 눈부신 녹색 광선의 출처는 확인이 가능하였다. 바로 위로 주욱 째진 그녀의 고양이 같은 눈이었다. 몇 번이나 눈을 질끈 감고 다시 떠봤지만 여전히 이 꿈같은 상황에서 깰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동이 틀 때까지 지속되었다.

4.

 그 일이 있고 나흘이 흘렀다. 다행히도 재스민은 이 충격적인 사건을 금세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오히려 그녀는 해답을 찾은 듯이 마음이 편해졌다. 왜인 줄은 모르지만 어린 시절부터 그녀는 스스로 어딘가 비범한 구석이 있다고 여겨왔다. 그런데 드디어 그 허황된 믿음의 근거를 찾아낸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초능력자로 규정하였다.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 힘은 과학상식을 뛰어넘는 기이한 것이 분명했으므로. 그녀는 자신의 능력에 이름도 붙였다. <고양이 눈>, 그녀와 걸맞는 우아하고 신비스러운 이름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잠도 자지 않고 학교도 가지 않았다. 오로지 그녀의 능력을 탐구하는 데에 몰두하였다. 그녀는 연습을 통해 <고양이 눈>을 임의대로 작동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그것을 통제할 수 있었다. 게다가 몇 가지 사실도 발견할 수 있었다. 우선 이 초인적인 능력은 아주 깊은 어둠 속에서만 발현된다는 것, 눈에서 나오는 광선은 최대 20인치 앞까지 도달이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아쉽게도 그 빛에 뜨겁다거나 하는 물리적인 힘은 없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지금 세상에서 별다른 쓸모가 있는 건 아니었다.

 재스민은 한편으로는 그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슈퍼히어로로 대의를 위해 본인의 인생을 헌납할 만큼 숭고한 뜻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그녀는 모름지기 큰 힘에는 더 큰 책임이 따른다는 말을 믿었다. 그녀에게 <고양이 눈>은 누구나 가질 수 없다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충분했다. 적어도 그녀는 그것으로 족했다. 그녀는 마치 수만 달러짜리 다이아 반지를 선물 받은 사람처럼 뛸 듯이 기뻤다. 온종일 애지중지 자기의 능력을 어루만졌다.

5.

 학교를 빠진 지도 나흘째, 재스민은 인생을 침대 위에서 낭비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자신처럼 멋지고 우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더욱이 그러했다.

<고양이 눈>이 옷장 속 먼지 쌓인 패물처럼 돼버릴까 봐 전전긍긍하였다. 지금의 재스민에게는 무대가 필요하다. 그녀의 특별함을 뽐낼 수 있는 멋진 무대가.

작가의 이전글 오래된 일기 -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