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와 춤을, 아니 늑구와 축구를

대한민국 진상 분석 보고서

by 김성윤

<늑대와 춤을>이라는 영화를 아는가? 1991년에 개봉한 이 영화는 작품상, 감독상, 촬영상 등 아카데미 7개 부문을 석권한 명작이다. 대학 신입생 시절 대한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고 느꼈던 웅장한 전율은 여전히 내 뇌리에 선명하다.


영화는 남북 전쟁의 영웅 던바 중위(케빈 코스트너)가 인디언의 삶에 동화되는 과정을 그린다. '늑대와 춤을(Dances with Wolves)'이라는 이름을 얻은 그는 '주먹 쥐고 일어서(Stands with a Fist)'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진다. 웅장한 자연 속에서 펼쳐지는 서사도 인상적이지만, 내가 주목한 것은 던바 중위가 타인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건너간 '공감의 다리'다.


나는 이 영화에서 남들이 언급하지 않는 세 가지를 말하고 싶다. 첫째는 '공감'에 대하여, 둘째는 '멀리 보는 것'에 대하여, 그리고 마지막으로 '분노'에 대하여. 요즘 출몰하는 진상 때문에 피해를 입고 있는 모든 국민에게 이 글을 바친다.

현대식 모카신

공감 능력 결여

영화를 본 비슷한 시기, 인류학 교양 수업시간에 모카신 워킹(Moccasin Walking)이라는 걸 배웠다. 모카신은 인디언들이 신었던 부드러운 가죽 신발로, 지면의 굴곡을 그대로 발바닥에 전달한다. 모카신 워킹이란 그 사람이 걷는 길의 돌멩이, 흙, 온도를 똑같이 느껴보며 상대가 처한 환경과 그가 겪는 고통을 직접 경험해 본다는 깊은 공감(Empathy)의 의미를 담고 있다. 'Don't judge a man until you have walked a mile in his moccasin'이라는 격언에서 moccasin이 shoes가 되어 walk in someone's shoes가 역지사지의 의미를 담게 된 것이다. 현대식 모카신을 신을 때 양말을 신고 신으면 촌스럽게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던바 중위는 여타 백인들과 다르게 모카신 워킹을 했다. 그는 인디언들이 왜 그런 생활양식과 의식을 갖게 됐는지 이해하게 됐고 그러면서 그들에게 동화되어 갔다. 일반 백인들이 인종주의적으로 미개하다며 인디언을 소탕의 대상으로 바라본 것과 완전 다른 시각을 가졌던 것이다.


<서울신문 기사>

우리가 맞닥뜨리는 진상들 중에는 이런 공감 능력이 결여된 사람들이 아주 많다. 얼마 전 대전의 한 동물원에서 늑구라는 야생 늑대가 탈출하자 큰 소동이 벌어졌다. 다행히 늑구는 안전하게 돌아왔다. 그런데 전 국민의 관심이 쏠린 상황에서 동물원 측이 늑구가 먹이를 먹는 사진을 공개했더니 사달이 났다. "왜 먹이를 맨바닥에 주느냐", "밥그릇이 없냐, 비위생적이다"는 극성 민원이 쇄도한 것이다. '내 거실의 강아지'라는 자신의 틀 안에서 늑대를 바라본 것이다. 그러자 동물원 측은 "야생동물인 늑대는 본래 먹이를 그릇에 담아 먹지 않는다. 매뉴얼대로 한 것이다"는 친절한 해명을 내놓았다. 일부 언론에서는 '극성 늑구맘'이라는 표현을 썼다가 뭇매를 맞기도 했다. 왜 '맘'을 폄훼하느냐는 댓글이 빗발쳤다. 진상이네 집에는 '공감능력 결여'가 살고 있다.


좁은 시야

영화 속 던바 중위가 인디언들과 생활하면서 깜짝 놀라는 장면이 있다. 인디언들은 보이지도 않는 먼 곳에서 버펄로 떼가 이동하고 있음을 알아챈다. 인디언들은 사냥을 하고 광활한 초원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아주 '넓은 시야'와 '멀리 보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조선일보 오피니언>

최근 대통령까지도 우려를 표명한 초등학교 축구, 운동회, 소풍 금지가 화제다. 내 아이 다친다, 패배감 느낀다, 맞벌이 부모는 운동회에 못 가니 아예 모든 부모 참석을 불허해야 한다는 민원까지. 민원을 제기할 수 있고 경청할 필요도 있다. 그러나 소수의 민원으로 인해 다수가 피해를 입는다면 그것은 민원이 아니라 진상짓이다.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 민원인들의 자녀 역시 피해자가 된다. 배움은 교실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좁은 시야로 내 아이를 보호하려다 오히려 내 아이의 성장을 막는 것이다. 진상이네 집 2층에는 '좁은 시야'가 산다.


한 지붕 세 가족

진상이네 집에는 '공감능력 결여'와 '좁은 시야'만 사는 줄 알았는데, 봉준호의 <기생충>에서 처럼 지하에 누군가 살고 있었다. 무시당한 상처로 인한 '분노'가 살고 있었다. 영화 속 던바를 극도로 적대시했던 인물은 '머리에 부는 바람(Wind in His Hair)'이었다. 그는 이유 없이 던바를 싫어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삶의 방식과 가치가 백인들로부터 오랫동안 무시당해 온 상처가 분노로 굳어 있었고, 던바는 그 분노의 표적이 됐을 뿐이다.


결국 진상은 이렇게 완성된다. 무시당한 상처로 인한 분노(지하) → 공감 능력 결여(1층) → 좁은 시야(2층). 꼭대기에서 폭발하는 민원과 항의는 이 구조의 가장 바깥에 드러난 증상일 뿐이다.


Godfrey's Cordial

갓프리 코디얼(Godfrey's Cordial)을 들어봤는가? 19세기 영국과 미국에서 영유아를 달래기 위해 널리 사용된 시럽 이름이다. '엄마의 친구'라는 별명을 가졌고 처방전 없이 구입할 수 있어 불티나게 팔렸다. 먹이기만 하면 칭얼대던 아이가 조용해지고 잠도 잘 잤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약물에는 아편이 들어있었다. 당시 의료 지식의 한계로 수많은 아이가 이 약물로 사망하거나 중독되었다. 오늘날 이 약물은 '빅토리아 시대의 아동 학대와 무지의 상징'으로 교과서에 기록되어 있다.


진상짓으로 분류되는 행동의 상당수는 악의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내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 아이를 지키고 싶기 때문에 벌이는 일들이다. 그러나 공감 능력이 결여되고 시야가 좁아진 상태에서 나온 사랑은, 당장의 효과를 바라는 조급함으로 이어져 갓프리 코디얼을 찾게 만들 수 있다. 4세 고시, 7세 고시를 보러 학원에 아이 손을 끌고 가는 엄마는 진상이라는 집을 짓고 있을 가능이 높다.

Godfrey's Cordial을 먹이지 않았는데도 아이가 조용하다?



같을 동(同), 마음 정(情)

나는 학부모를 대상으로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다 보니 진상 학부모를 많이 목격한다. 우리 회사가 이들을 대하는 태도는 무시나 경멸이 아니라 동정(同情)이다. 회사 핵심 가치 중 하나가 어질 '인(仁)'인 이유다. 공감 능력이 결여되고, 시야가 좁고, 상처받은 분노를 안고 있는 학부모 때문에 가장 크게 피해를 입는 존재는 우리가 아니라 그 학부모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끝까지 설명하고 설득한다. 부모가 영어유치원에 보내 줄 돈이 있고, 물려받을 재산이 있는 아이가 행운아가 아니라 나를 잘 양육해 주기 위해 공부하는 지혜로운 부모를 만난 아이가 행운아라고. 신문에 기고까지 해 가면서 설득한다. 부모의 사랑은 뜨겁되, 부모의 지혜는 서늘할 정도로 객관적이어야 한다.


방어적일 수밖에 없는 학교라는 조직이 소수 민원인의 인질이 되어 대다수 학생들이 피해를 보고 있는 현실은 바뀌어야 한다. 대통령이 우려를 표명하면서 이 문제가 공론화됐으니, 이참에 근본적인 해결책이 마련되기를 바란다.


사족

최근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를 2화까지 보았다. 무가치함과 싸우는 진상이 한 명 등장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상대역이 내가 좋아하는 고윤정이라 참을 수 없었다. 존경하는 박해영 작가님, 어찌 이런 캐스팅 만행을 저지를 수 있단 말입니꽈아아아아아~~! 나는 시청을 포기했건만, 계속 시청하는 모든 분들께 존경을 표한다. 진상이라고 TV를 끄지 않고, 황동만의 모카신을 한번 신어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은 참 현명한 일이다. 이왕 던바 중위처럼 모카신을 신어 볼 참이라면 양말은 꼭 벗고 신기를 바란다.








작가의 이전글선행학습을 이기는 최고의 학습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