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책을 좋아한다. 종이책과 이북을 합해서 500권은 족히 가지고 있을 것이다. 책장은 두 개를 놓고 쓰는데 늘 자리가 부족하다. 주기적으로 안 읽는 책을 솎아내고 알라딘에 박스째 팔아버린다. 얼마 안 가 비운 자리는 새 책으로 다시 채워진다. 그래도 버림의 효과가 있는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 비해 책이 많은 편은 아니다. 나는 미니멀리스트이기도 하다. 미니멀리스트라고 단정 짓기엔 책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으니 미니멀리스트가 ‘되고 싶은 자’ 정도로 하자. 물건은 꼭 필요한 것만 들여놓자고 생각한다. 쇼핑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 철마다 새 옷을 사 입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있는 옷을 두고두고 돌려 입는 사람도 있다. 나는 후자에 속하는 편이다. 지난겨울 버린 파란색 니트는 팔꿈치 부분이 닳을 때까지 10년을 넘게 입었다. 침대 밑 서랍 세 개와 옷장 한 칸이면 사계절 옷이며 속옷, 잠옷까지 다 넣고도 충분하다. 운동화는 한 벌. 밑창이 떨어지거나 뒤축이 해지면 버리고 새로 산다.
거실에 돌 소파를 들인 뒤로 집안이 많이 바뀌었다. 엄마는 가만히 있다가도 금세 먼지떨이나 걸레를 집어 들었다. TV장 서랍 안이며 장식장 위 액자가 놓인 공간이며 어딘가는 기어코 뒤집어 놓고 말았다. 하루 종일 쓸고 닦고서도 또 쓸고 닦기를 멈추지 않았다. 집안은 눈에 띄게 깔끔해졌다. 어지러이 놓여있던 물건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했다. 나도 덩달아 움직였다. 물건을 하나하나 뜯어 살펴보며 쓰임새를 되찾으려고 했다. 오늘은 회사에 컵 받침대를 가져갔다. 여름이면 얼음이 든 컵 바깥에 물방울이 맺혀 휴지를 몇 장이나 뽑아 닦기 일쑤였다. 집에 찾아보면 컵 받침대로 쓸만한 물건이 하나쯤은 있겠지 싶었다. 마침 막내가 실링 왁스를 녹이기 위해 사놓은 실리콘 받침대가 있었다. 별거 아니었는데도 무언가 기발한 발명을 해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무실에서 괜히 보는 사람마다 컵 받침대가 필요하지 않느냐고 물으며 다녔다.
미니멀리즘이 유행처럼 번지던 시기가 있었다. 언젠가 봤던 일본인 미니멀리스트의 영상 속에서 작은 나무상자 하나는 수납장으로도 쓰이고 식탁으로도 쓰였다. 심지어 그 상자는 높은 데 놓인 물건을 꺼낼 때 밟는 발 받침대로도 쓰였다. 그 영상이 왜 내 마음을 이끌었는지 나도 모르겠다. 좋은 물건 하나를 이렇게도 쓰고 저렇게도 쓰는 건 근사한 일처럼 보였다. 텅 빈 공간에 몇 개 없는 물건으로도 너끈히 살아내는 건 내 로망이었다. 다만 나의 미니멀리즘은 어딘가 좀 어긋나 있었다. 나는 충분히 예쁘지 않거나 잘 쓰일 것 같지 않으면 상태와 상관없이 그 물건을 내다 버렸다. 그럴 때마다 엄마의 지적은 어김없었다. “너 그거 다시 산다, 내 장담한다.” 나중엔 그 잔소리가 듣기 싫어 엄마 모르게 옷 안이나 가방에 숨겨서 나가 버렸다. 그런 사람은 나뿐만이 아닌 듯했다. 비움이랍시고 세간 살림을 몽땅 내다 버리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미니멀리즘의 인기는 반짝이었다. 나는 어쩐지 흑역사를 쓴 것만 같은 기분에 미니멀리즘과 관련된 영상을 의식적으로 거부했다.
알고리즘은 기가 막힌다. 내가 동생과 방 바꾼 걸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인테리어 관련 영상이 유튜브에 뜨기 시작했다. 홀려서 알고리즘이 추천해 주는 썸네일을 계속 눌렀다. 타고 타다 보니 살림 영상이 주루룩이었다. 우연히 어떤 미니멀리스트의 집안을 엿보게 되었다. 배수구마저 깨끗한 싱크대 위에 올려진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식탁 위도 깨끗했고 수납장 안은 정리가 잘 되어있었다. 모든 공간엔 여백이 있었다. 비슷한 계통의 영상을 몇 편 봤다. 몇 번이고 돌려본 영상도 있었다. 잘 정돈된 남의 살림을 보자 내 마음도 넉넉해졌다. 그래 이거였지, 내가 좋아하던 거. 다시 그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동경하게 되었다. 지금 내가 가진 물건으로도 충분하고 더 이상 내 공간에 무언가를 채우지 않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미니멀리스트였다.
이제 책은 사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구립 도서관은 현재 구비하고 있지 않은 책을 사용자가 신청해 주문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제도를 충분히 활용하고 웬만하면 책은 빌려서 읽어야겠다. 가진 물건을 소중히 여겨야겠다. 내 수중에 들어온 것들이 그 가치를 다할 수 있도록 아끼지 않고 써야겠다. 그러고 보면 집에 오래된 물건들이 꽤 많다. 내 방에서 가장 오래된 것을 꼽자면 연필꽂이다. 엄마가 결혼하기 전, 그러니까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회사에서 받은 것이다. 원목 가구에 어울리는 예쁜 것을 새로 사다가 놓아도 될 일이지만 나는 있는 것을 최대한 곱게 쓰기로 했다. 좋아하는 색의 형광펜과 자주 쓰는 필기구를 가득 꽂았다. 30년을 넘게 그 쓰임을 다하고 있는 물건이 어쩐지 기특하고 예쁘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