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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우리가 하고 싶었던 말은

by 누런콩

“12시 반 비행기면 집에서 몇 시에 나가야 하지?” 코로나 이후 해외는 처음인 엄마가 출국 전날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필요한 건 세면도구밖에 없었다. 숄더백 하나에 짐을 다 넣고도 공간이 한참 남았다. 올해 관숙 출장지는 중국 난징이었다. 현지에서의 체류 시간은 길어봐야 24시간일 테지만 나는 엄마에게 꼭 같이 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16만 원짜리 객실이래, 나 혼자 묵어서 뭐 해. 심심한데 같이 가주면 안 돼?” 그래도 귀찮다는 엄마에게 카운터 펀치를 날렸다. “큰딸 소원이야.” 엄마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행여나 엄마가 여권 만료일을 핑계로 못 가겠다고 할까 봐 나는 초록색 커버지로 된 엄마의 여권을 꼼꼼히 살폈다. “그거 10년짜리야, 같이 갈 테니까 걱정하지 마.” 엄마의 사진 옆에 적혀있는 숫자를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짚고 있는 내게 엄마는 말했다. “그럼 다행이고.” 나는 새침을 뗐지만 들뜬 마음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까지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엄마의 칩거 생활이 이렇게 끝나다니. 코로나 직전 잠깐 나가 살던 내가 다시 집으로 들어오고부터 엄마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밖에 나가는 걸 꺼렸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는 게 버킷리스트라고 노래를 부르면서도 집 앞 산책로 한 번 걷는 법이 없었다. 기껏해야 한 달에 한 번, 생필품이나 먹을 걸 사기 위해 코스트코에 가는 게 전부였다. 어떤 날은 그마저도 힘들어했다. 엄마는 사람이 많아서 숨이 막힌다고 했다. 나는 엄마가 자꾸만 집 안으로 파고들어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붐비는 마트 안 사람들도 수용할 수 없는 정도의 몸이 되어버린 것이다. 숨고 피하려 할수록 상황은 더 안 좋아질 뿐이라고 생각했다. “산티아고 가면 어쩌려고 그래? 모르는 사람투성이일 텐데.” 참다못한 내가 쏘아붙여도 엄마는 완강했다. 여행은 고사하고 잠깐 바람이나 쐬러 나가자는 것도 싫다고 했다. 5년, 자그마치 5년이었다.


엄마는 아빠의 물건을 버리지 못했다. 옷이나 잡동사니는 물론, 칫솔 하나도 아빠가 떠난 자리 그대로 남겨두었다. 언젠가는 다시 올 사람인 것처럼, 엄마는 아빠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아빠 사진이 걸려있는 거실에 엄마는 커튼을 치고 살았다. 우리 집은 빛이 잘 드는 편인데도 가구로 창을 다 막아두어 컴컴했다. 거실에 깔아놓은 매트리스라도 치우자고 하면 엄마는 그냥 놔두라고 했다. 다 큰 자식 세 명이 각자 방 하나씩을 차지하고 있어 갈 곳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나는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럼 내가 막내랑 방 같이 쓸게, 엄마가 안방 써.” 엄마는 어떻게 그러냐며 한사코 “여기가 내 자리야”라고 했다. 답답했다. 엄마가 옛날 기억을 끄집어내 내게 곱씹는 것도, 시간이 멈춘 듯한 집에 머무르는 것도.


우리는 3시간도 전에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가 몰리는 시간대라 해도 일렀다. 내 티켓은 확약이었지만 엄마 티켓은 대기라 재수가 없으면 출발 50분 전에나 표를 줄 거였다. 나는 지하철을 타고 가는 내내 회사 사이트를 열어 잔여석을 확인했다. 남은 건 100석 이상이었다. 단체 손님이 몰려들지 않는 이상 걱정은 없었지만 불안했다. 다행히 직원은 기다리라는 말 없이 바로 표를 주었다. 보안검색대를 통과하고도 출발까지 시간이 한참 남았다. “다 바뀌어서 어디가 어딘지 하나도 모르겠네…….” 엄마는 면세점 돌아다니는 걸 어색해했다. 때마침 시내 백화점에선 재고가 다 떨어졌다는 색상의 립스틱이 보였다. “이거 내가 찾던 건데! 옛날엔 어디 놀러 갈 때마다 꼭 립스틱 하나씩 샀었잖아, 그치?” 넋을 놓고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탑승 시간이었다. 나는 “손님들보다 빨리 가서 들여보내달라고 해야 해”라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이착륙 동안 나는 조종석 뒤에 앉아 있어야 했다. 엄마랑 같이 움직이긴 했지만, 어쨌든 나는 출장을 가는 거였다. 난징까지 비행시간은 2시간이 조금 넘게 나왔다. 칵핏과 객실을 왔다 갔다 하느라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몰랐다. 손님들이 다 내리고 나서야 나는 난징 땅을 밟아볼 수 있었다. 브릿지 옆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엄마는 내가 내리자마자 내 팔을 낚아채고선 속삭였다. “내 평생에 이런 환대는 처음 받아본다 야, 딸 덕에 호강한데이.” 캐빈 승무원들이 내가 훈련받는 동안 번갈아 가며 엄마에게 자리는 어떠시냐, 불편한 건 없으시냐 물어본 모양이었다. 땅콩 같은 것도 왕창 챙겨주었나 보다. ‘좀 더 살갑게 굴다 나올걸…….’ 달뜬 마음을 뒤로한 채 우리는 호텔 가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중국은 여전하네…….” 나는 엄마가 감상에 젖어 드는 게 달갑지 않았다. 또 지난 이야기, 아빠와 살던 때의 추억을 꺼내놓을까 봐 두려웠다. “여기 지하철 깔린 것 봐, 우리가 살던 때랑은 차원이 달라.” 나는 엄마의 시선을 피하면서도 목소리를 죽이지 않고 말했다. 그날 밤 우리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나는 우리가 앞만 보면서 즐겁게 살았으면 좋겠어. 더 이상 (아빠 없는 삶을) 버텨내듯 살고 싶지 않아.” 깜깜한 호텔 방 같은 이불을 덮고 누우니 무슨 말이든 해도 되겠다 싶었다. 엄마는 그동안 해주지 않았던 이야기를 내게 해주었다. “아빠가 살아 돌아올 것 같았던 시간도 있었어, 살기 싫었을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아빠가 떠난 것보다 사는 게 벅차, 돈 때문에…….” 나는 몰랐다. 남편을 잃은 엄마의 삶에 닥친 현실들과 자식들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그 속앓이를. 나는 엄마가 슬퍼서 힘든 줄 알았다. 애도는 그만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한 내가 부끄러웠다.


엄마의 삶이 온전한 엄마의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아빠가 없어도 하고 싶은 것 하고 먹고 싶은 것 먹고……. 내가 하라는 건 누구나 (돈만 있으면) 좋아할 법한 필라테스, 해외여행, 뭐 이런 것들이었다. 말로 하면 그럴싸해 보이지만 책임져주지 않으면 더럽게 비싼, 뭐 그런 것들 말이다. “너 우리 집 아파트 관리비가 얼만 줄 알아? 네 식구 생활비가 다달이 삼백은 나가는데 그럼 그 돈은 다 어디서 난다고 생각한 거야?”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주제였다. 그러게, 그 돈은 다 어디서 충당하고 있었던 것일까. 아빠 연금은 고작 60만 원이었다. 엄마는 엄마가 불려둔 재산을 야금야금 털어서 이때까지 버티고 있었다고 했다. 이젠 그마저도 다 떨어져 남은 게 없는 상태라고. “네가 집에 돈 대주는 거 고마워, 근데 그거 말고도 돈 나갈 데가 너무 많아.” 엄마가 나열한 지출 항목을 쭈욱 들으면서 나는 숨이 턱턱 막혀왔다. 엄마에겐 시간이 충분치 않았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사는 것에 치이던 나날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동안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살아 준 엄마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엄마의 얼굴은 한결 편안해 보였다. 나는 심란해졌지만 내색하고 싶지 않았다. 모처럼 간 (출장 겸) 여행에서 우리는 맛없는 마라 볶음을 먹었다. “마라 깐반인지 뭔지, 그거 영 못 먹겠더라.” 엄마는 난징 음식이 입에 안 맞았다며 깔깔댔다. 근사한 호텔에서 호화로운 아침도 먹었다. 딱 봐도 현지 음식처럼 보이는 국수를 엄마가 내게 자꾸 먹어보라고 권하는 바람에 나는 삭힌 오리알이 들어간 그걸 입에 넣었다 뱉었다. “다음에도 중국 가면 데리고 가 줘, 난징도 괜찮네.” 사람이 붐비는 서울 지하철 안에서 엄마는 조금 웃는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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