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사의 안경을 샀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써서 유명해진 브랜드 제품이다. 마치 코에 얹지 않은 듯 가벼운 무게를 자랑한다. 안경테만 해도 10% 할인을 적용받아 80만 원이었다. 어마어마한 가격대인데 국산 렌즈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더 비싼 독일산 렌즈를 끼워달라고 했다. 나의 시력은 꽤 좋은 편이다. 안경은 일할 때 모니터에서 흘러나오는 블루라이트를 차단하는 용도로 쓰는 게 전부다. 그런데도 사치를 부린 건 ‘나를 위해 이 정도도 쓰지 못할 거면 돈 벌어 뭐 하겠나’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남들은 몇백만 원짜리 가방도 턱턱 산다는데. 게다가 안경이라면 꽤 쓸모 있는 아이템 아닌가. 아주 터무니없는 소비는 아니라면서 나를 달랬다. 카드를 내미는 손이 덜덜 떨렸지만 태연한 척했다. 그래, 안경은 얼굴이라잖아. 그만한 값어치를 할 거야. 가게 직원이 시력검사를 해주는데 숫자가 다 보이는 게 민망해서 일부러 이상한 숫자를 댔다. 도수가 올라간 렌즈는 조금 어지러웠지만 기분만큼은 째지게 좋았다.
한동안 나의 안경은 사무실의 화제였다. 안경 근사하네, 얼마나 가벼운지 보자. 안경 샀다며? 백만 원짜리 안경은 어떤지 보자. 너도나도 한마디씩 던졌다. 회사엔 비밀이란 게 없다. 회식 자리에서 딱 한 번 자랑한 게 온 사람들에게 퍼졌다. 렌즈값까지 얹어서 100이 조금 안 되는 내 안경은 그냥 100짜리 안경이 됐다. 굳이 숨기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분수에 맞지 않게 돈을 써대는 이미지로 비치는 것 같아 께름직했다. 남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도 영 마뜩잖았다.
회사에선 별의별 이야기를 다 하게 된다. 동생이 몇 년째 취직을 못 하고 있다든가, 집에 가져다 바치는 돈이 아까울 때가 있다든가. 주식을 시작했는데 수익률이 오히려 떨어져 ‘벼락 거지’가 되어버렸다는 이야기도 서슴지 않는다. 10년을 가까이 다니다 보니 믿을만한 사람이 꽤 생겼다. 마음을 터놓고 개인사를 풀어내도 불안하지 않은 사람들. 몇 달 전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나를 잡아준 것 역시 이들이었다. 월급이라는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도 있지만 회사 밖에서 더 이상 이들을 볼 수 없겠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허전했다. 그동안 수고했다며 내 등을 두드려준 과장님, 언제든 하고 싶은 게 생긴다면 해 보라고 했던 과장님(어쩌다 보니 다 과장님들이다). 그러다가도 가끔은 모든 게 다 싫어진다. 누가 누구를 미워한다는 둥, 누구랑 누구는 서로 말도 섞지 않는다는 둥. 이 좁은 공간에서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 모습을 볼 때마다 다 큰 어른들끼리 왜 저러나 싶다.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나 역시 숙적이 있다. 그가 나보다 돋보이는 게 못 견딜 만큼 배가 아프다. 회사 역시 하나의 공동체라는 걸 절실히 느낀다. 여기도 어쩔 수 없는 사람 사는 곳인지라 다 비슷비슷한 사람 사는 모양새를 보인다.
내가 아주 신입이던 시절 회사에서는 일만 잘하면 되는 줄 알았다. 사회성이 좀 떨어지더라도 일만 열심히 하다 보면 결국엔 진가가 드러나게 되어 있다고 믿었다. 맞는 말이다. 꾸준히 성실한 자세로 임하다 보면 누군가는 그 모습을 알아봐 준다. 그런데 그게 소위 말하는 성공한 직장인의 척도, 즉 높은 인사 고과로 인한 빠른 승진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 소처럼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이 진급에서 미끄러지는 경우를 나는 너무 많이 봐왔다. 회사에서는 할 게 많다. 대인관계도 잘 맺어야 하고 남들에게 비치는 태도나 이미지도 잘 구축해야 한다. 이제야 느끼는 것이지만 자신을 잘 포장하는 능력을 얌체 같다고 욕할 필요가 전혀 없다. 물론 알맹이도 없는데 부풀리는 것이야 꼴사납지만 자신의 성과를 조금씩은 다듬어도 나쁠 게 없다. 꼭 승진을 위한 게 아니라도 말이다. 처세에 능한 건 직장생활의 질을 높여준다. 막말로 상사나 동료에게 밉보이거나 평가절하당해서 좋을 게 뭐가 있겠나. 또 누가 그러기를 원하기나 하겠나.
여전히 나는 그 비싼 안경을 쓴다. 우당탕 회사 생활을 나름대로 이어 나가고 있다. 다음 안경으로 바꿀 때면 내가 조금은 나은 사람이 되어 있을까? 지금보다는 조금의 지혜를 더 터득한 상태일까? 앞으로 10년은 거뜬할 이 안경만큼 오래도록 내 회사 생활이 유지되었으면 좋겠다. 정년까지. 가늘고 길지만 튼튼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