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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런콩 Jan 02. 2024

어쩌다 발견한 편지

오늘도 어김없이 다꾸에 빠져있었다. 아침에 떡국을 먹고 한숨 잔 다음에 나는 스티커를 사러 영등포 타임스퀘어로 갔다. 이번 달에 쓸 수 있는 돈은 겨우 20만 원밖에 남아있지 않았지만 다꾸 용품을 사는 건 포기할 수 없었다. 1만 6천 원 치의 스티커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사들인 다꾸템도 꽤나 많아져서 보관함이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안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얼핏 DVD 케이스들을 모아놓았던 나무상자가 기억났다. "여기 어디쯤 있을 것 같은데……." 소란을 피우며 돌아다니자 엄마가 옷장 위를 찾아보라고 했다. 크기가 다른 나무 곽 두 개가 보였다. 이게 웬 횡재인가 싶어 냅다 쌓인 먼지를 털어냈다. 있을 줄 알았던 DVD 포장지들은 그 자리에 없었다. 대신에 어릴 적 받았던 편지들과 친구들과 같이 찍었던 사진들이 있었다. "쓰레기들이야, 다 버리자." 나는 괜히 심통이 났다. 지금까지 연락하는 친구는 단 한 명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누가 줬는지 보자며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나는 괜히 겁이 나서 고개를 돌렸다. 초등학생 때 친했던 친구가 보내준 국제 편지가 대다수였지만 천진에 있을 때 친구들이 써준 것도 많았다. 휴지통에 담으려다가 말리는 엄마의 성화에 그대로 다시 넣었다. 방에 들고 와서 나는 찬찬히 그 편지들을 들여다보았다.


어떤 편지는 차마 읽을 수 없었다. 마음이 너무 아팠기 때문이다. 한때 우리는 애틋한 사이였다. 나에게 편지를 가장 많이 써준 친구는 싫다고 말하지만 나를 좋아해 주었다. 그때 우리 사이는 빛바랜 종이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너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나를 너무 좋아해 줬어, 맹목적인 사랑이었지. 사실 나도 니가 너무 좋아!"라는 식이었다. 지금도 제일 많이 생각나는 친구는 "넌 뭔가 옆에서 계속 챙겨줘야 할 것 같아"라고 썼다. 나는 한동안 옛날 친구들이 손으로 써준 편지를 읽으면서 상념에 빠졌다. 그 애들에게 남아있는 건 더 이상 원망이나 서운함 따위의 것이 아니었다. 그리움뿐이었다.


요즘 부쩍 고등학교 친구들 꿈을 자주 꾼다. 꿈에서 우리는 아주 익숙한 공간에 같이 있다. 학원 셔틀버스나 등하굣길에 탔던 택시 안……. 나는 때때로 그 애들에게 속에 있었던 말을 쏟아낸다. 희미해져 기억나진 않지만 그건 비난일 때도 있고 다정함일 때도 있다. 꿈을 꾸고 나면 깨고 나서도 한참 동안 그 감정에 사무친다. 수백 번도 넘게 지금까지 우리가 친구 사이였다면 어땠을까, 그때 내가 좀 참았더라면, 억지로라도 인연의 끈을 놓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다 부질없는 짓이라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지우려고 했다. 무리에서 혼자 튕겨져 나온 나는 그랬다. 그런 시간을 보냈다. 지금의 내 모습이 훨씬 마음에 든다고 나를 몇 번이나 위로했지만 옛 친구들을 향한 그리움은 짙어져만 갔다. 지나간 인연에 대한 글을 썼고, 그 글을 애들이 읽으면서 우리는 영영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언젠가 한 번은 털어내고 싶은 감정이었지만, 지금에서야 내가 참 경솔했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끝난 관계였지만 그렇게까지 상처를 줄 필요는 없었다. 좋은 추억으로만 남길 수 있었는데도 나는 초를 쳤다.


얼마나 많은 인연을 지나쳐 왔던가. 또 얼마나 많은 인연을 지나쳐 갈 것인가. 마음은 딱딱해지지가 않아서 나는 매번 상처를 받는다. 인연을 떠나보내기까지 온갖 감정에 휘둘리고 아파한다. 영원한 관계는 있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더 이상 누군가가 내 곁을 떠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또 어떻게든 견디게 되겠지만 두려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편지는 잘 봉인해 두었다. 차마 끝까지 읽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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