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진다. 나에게는 이른 장마가 시작되었다. 퇴근 중인 차 안에서 아차 싶다. 이런 비에는 음식 배달이 한참 밀릴 텐데 미리 주문했어야 했다. 냉장고에 저녁거리가 있었던가 잠시 고민한다. 집에 도착해 부랴부랴 냉장고를 확인해 그저께 끓여 넣어둔 콩나물국이 있음에 안도하고 애호박전을 부쳐 오늘도 무사히 저녁을 해결했다.
식탁 앞에 앉은 첫째는 기말고사 기간이라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오늘은 비도 많이 오니 집에서 있었음 했는데 여느 때처럼 스터디카페에 가겠다 한다. 엄마가 데려다줄 테니 뒷정리하는 동안 30분이라도 눈 부치라 했다. 그러겠노라며 침대로 슥~들어간다. 30분은 금방 흐르고 그 새 한잠 들어버린 아이가 안쓰러워 잠시 고민한다. 더 재워도 지금 깨워도 아이에게 좋은 반응을 기대할 수는 없을 테니 야속한 엄마가 되기로 한다. 아이를 스터디카페에 데려다주고 곧장 집 앞 헬스장에 다녀온다. 나가기 전 세탁기에 돌려놓은 빨래들을 건조기에 넣고서야 거실 테이블 내 자리에 털썩 앉는다. 고개를 돌려 벽시계를 확인한다. 밤 11시 10분 전이다. 1시간 남았구나... 읽고 있던 책을 펼쳐 오늘의 필사를 하며 아이의 귀가를 기다린다.
큰아이는 3주째 집에서 멀지 않은 단골 스터디카페에서 공부하다 밤 12시가 넘어서 돌아오고 있다. 12시 전후로 아이에게서 “지금 나가요”라는 톡이 오면 아이가 걸어오는 길로 마중을 나간다. 중간쯤인 구름다리에서 우리는 만난다. “피곤하지?” 아이의 무거운 가방을 어깨에서 내려 내 어깨에 대신 걸치니 아이가 말했다. “엄마, 제가 요즘 어떤 생각하면서 공부하게요?” “글쎄?” “5일 남았다. 4일 남았다. 3일만 버티자. 이렇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어요.” “네가 지금 고3 수험생도 아니고 뭘 그렇게까지 생각해?” 쉬엄쉬엄하라는 말을 덧붙일까도 하다가 애쓰고 있는 아이, 괜스레 김샐까 봐 그냥 목구멍으로 삼킨다. “제가 지금 할 일이니까요” “그렇긴 하지...” 마음속으로는 웃으며 대답했다. “어차피 시간은 흐르니까, 앞으로 3일 동안만 하고 싶은 거 참고, 시험 끝나면 잠도 실컷 잘 거예요... 그런데 시험 전엔 잠이 젤 고픈데 꼭 시험 끝나고 나면 잠이 희한하게 싹 달아나더라구요.” “놀아야 되니까” “그죠.” 엄마 듣기 좋으라고 꿀 발라 얘기하는 건가... 난 배시시 혼자 웃다가 문득 아이에게는 공부가 일인 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공부가 재밌고 즐거워서 하는 학생이 얼마나 있겠으며, 밥벌이가 즐겁고 행복해서 하는 직장인이 있을까.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 없는 우리는 ‘즐거움’을 잠시 미루고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해야 할 일에 집중을 하고 있는 거지. 좋아하는 것을 열심히 하는 것보다 좋아하는 것을 참는 게 훨씬 더 힘들지 않나.
워커홀릭. 지난 한 주 내내 이 단어를 안고 지냈다. 과연 내가 워커홀릭인가? ‘오로지 일에만 몰두하여 사는 사람’을 지칭한다는데 나는 주어진 일을 정해진 시간 안에 해내려고 노력하지만 굳이 근무시간 이후에 야근을 하면서까지 하고 싶지 않고, 근무시간 이후의 내 시간을 절대적으로 보장받길 원한다. 그래서 퇴근하면 스위치 내리듯 선을 긋고 퇴근 후의 삶을 꿈꾸는 나는 아무래도 워커홀릭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난 잠들기 전에 막힌 업무를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하다 꿈에서 해결책이 나오기도 해.”,“난 주말에 책상 앞에 앉아서 다음 날 쓸 보고서의 와꾸(틀)를 잡아. 머릿속에서 구상을 하는 거지. 그리고 출근해서 보고서를 쓰면 술술 나와.”라고 말하던 선배들이 있었다. 나는 ‘저 선배들은 정말 대단하네, 선배들은 저렇게나 열심히 일을 하는데 나는 왜 그러지 못할까?’라고 자책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 선배들은 출근해서나 퇴근해서나 그 일을 하고 있기를 택한 사람들인 것이고 나는 직장에서의 일과 퇴근 후의 일을 철저히 구분하길 바라는 사람이었다.
퇴근 후의 내 모든 일상도 나의 일이다. 집에서도 나의 즐거움을 위해 하는 일이 있고, 가족들을 위해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보고서 쓰다 화장실 가는 길에 내일 아침 배송될 우유와 방울토마토를 주문하고, 점심 먹고 오다가 집에 떨어진 물티슈를 주문하고, 쉬는 시간 커피 내리며 내일 둘째 학교 준비물을 확인하고, 출장을 가서도 원격으로 아이들 저녁을 챙긴다. 그 모든 일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하루 종일 각성해 있는 나는 정말 워커홀릭이지 않은가?
매일같이 야근하는 시간이 맞지 않으면 밥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한다는 타의에 의한 워커홀릭 남편조차도 그 일을 하면서 내가 하는 일까지는 절대 못하겠지. 아무튼 정신없이 일하고 퇴근 후 샤워 후 개운하게 소파에 앉아 몇 장이라도 읽는 소설책 몇 장을 즐기는 남편도, 기말고사 준비로 스스로 계획해 열공하고 있는 첫째도, 하교 길에 짧게라도 놀이터에 들려 친구들과 반드시 놀고야 마는 하는 둘째도, 그리고 나도 모두 워커홀릭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