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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seniya Jun 06. 2024

꽃의 시간 I

올해도 변함없이 봄이 오고 여름을 향해 자연의 시간은 돌고 있다.


 자연의 최절정인  눈부신 오월이 황홀하게 초록의 물결로 물들이며 산들산들 내 마음 안에 자리 잡았다.

집 나간 내님이 올 것 같은 설레는 마음으로  아침이 밝아오기를 기다리며 아직 감정만은 늙지 않은 것 같아 이미 시들어버린 꽃처럼 쭈글쭈글해진 겉모습에 실망한 마음에 위로가 되었다.

아직도 설렐 수 있다는 것이 고맙기도 한 나이가 되었다. 그 대상이 사람이 아닌 자연으로 바뀌었을 뿐,  그 설레는 감정은 여전히 나를 살아있게 해 준다. 아니, 조금  더 살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해 준다.


이 봄이 가고 나면 나는 몇 번의 봄을 맞이할 수 있을까?

쓸쓸하게 흘러내리는 낙엽을 보고 있자면, 또 이 아름다운 가을을 나는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느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사람이 그리워지는 것보다 계절의 아름다움이 기다려지는 인생이 되었다.

복잡한 인간사에서 조금은 한 발짝 물러나 아무 때나 속삭일 수 있는 자연과의 대화가 더욱 그리워지는 인생의 가을쯤...

자연의 시간은 이제 나에게 인간의 시간만큼이나 중요한 순간이 되어버렸다.

단순하지만 경이로운 자연의 시간. 그 자연의 시간 속에 변화무쌍한 꽃들의 시간은 자연의 질서 속에서  다양한 색상과 화려함으로 무료한 나의 시간을 달래준다.



지난겨울 추위 내내 자연의 시간은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었지만, 왠지 이 추위가 계속될 것 같은 걱정에 눈이 부신 봄이 올 것 같지 않은 불안감이 눈처럼  쌓이곤 했었다.

나의 생각이 기우라고 타박이라도 하듯이  한치의 어긋남이 없이,  올해도 수선화를 필두로 꽃들이 자신들의 순서에 맞게 겨우내 얼었던 땅속을 뚫고 올라오고 있었다.

세상의 시간과는 달리 자신들의 존재를 뽐낼  수 있는 시간은 짧게는 일주일임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기다리든 말든 정확하게 약속된 시간에 자신의 속내를 보여주고 또 아쉽게 사라져 간다.

그 아쉬움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다른 아름다움이 지워져 가는 아쉬움을  망각할 수 있도록 계절마다 다른 분위기의 자연들이 여기저기 앞다퉈 정신없이  올라오고 있다.


모든 꽃들이 아름답지 않은 꽃들이 없으나, 나의 한결같은 취향은 가을쯤 올라오는 수레국화와 같은  긴 꽃대의 하늘하늘 거리는 작은 꽃잎이 달린,  들에 핀 야생화가 그래도 나를 설레게 하는 꽃들이다.

그러나, 이런 나의 취향은 아랑곳하지 않고  5월은 모든 꽃들의 여왕인 작약과 장미꽃이 정원의 주인공들이 된다.


작약의 꽃송이는 탐스럽고 불그스름하게 상기된 갓난 아가의 볼모양과도 같이 앙증스럽고 머리가 몸통보다 큰 한 가분수처럼 크고 풍성하다. 그 무게에 짓눌려  가늘고 긴 줄기를 지탱하지 못하고 그 아름다운 얼굴들이 다들 땅을 향해 고개를 떨구고  있으니. 그 아름다움이 가려져 아쉬운 꽃이다. 그마저도 짧은 개화기간으로 더욱 애타게 만드는 꽃이기도 하다.

미인박명인가? 그 짧은 기간 동안이라도 아름다운 모습을 선사하고 또 내년을 위해 휴식에 들어가 버리고 만다. 거만하고 도도한 꽃이다.


작년 봄에 그로서리 마켓에서 철이 지나고 시든  작약 화분을 싼 값에 가져다 앞마당에 묻어놓고 잊고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보란 듯이  탐스러운 분홍몽우리들이  가느다란 줄기를 타고 몽글몽글 맺혀있었다. 커다란 구슬 방울 안에 아름다운 자태를 숨겨놓고. 마치 숨바꼭질을 하듯이 나를 기다리게 하는 밀당의 연인 같았다. 그러다 어느 날 마주친 화려한 작약의 꽃송이들은  게으른 정원지기에게 화라도 난 듯, 모든 송이들이 비 한 번으로 다 쓰러져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비가 잦은 이곳의 날씨는 작약에게는 최상의 날씨가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은 마음에 절화를 해 꽃병에 한아름 꽃아 주었다.

거실 한가득 은은하게 퍼진 작약의 꽃내음은 새색시가 시집갈 때 바르는 분냄새와도 같았다. 꽃에 취하고 향기에 빠져드는 꽃이다.

그나마 짧은 순간이라도 그 화려함에 반해, 나는 또다시 내년을 위해 분주를 해주어 더욱 풍성한  작약정원을 만들어볼 생각이다.



이른 겨울 미리 장미를 사다 놓고 먼저 자리를 잡고 있는 장미동산에 너무 늦게 심어주었더니 올해 장미는 영 시원챦더니 한 번도 장미는 풍성하게 성공한 적이 없었다. 사람과 사슴과의 전쟁에서 항상 내가 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탐스러운 장미꽃을 보기도 전에 모두가 잠든 이른 새벽녘에 몰래 와 장미 봉오리만 똑똑 얄밉게 따먹는 통에 그 아름다운 장미를 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감쪽같이  사라진 장미 송이를 보고 나면 어찌나 속상하고 분통이 터지는지, 그 속상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 속상함에 사슴들의 최애 디저트인 장미옆에 독을 품고 있는 란타나를 심어버렸다. 그 특유의 오이냄새가 사슴들이 싫어하는 향이라고 했다. 그 상큼함속에 새까맣게 옹기종기 모여있는 씨앗들은 독을 품고 있는 꽃이기도 했다.

사슴과 뱀들이 피해 다닌다는 메리골드를 사방에 두르고 장미와 란타나를 함께 심었다.

메리골드의 영향인지 다행히도 몇 송이의 장미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슴들도 자연의 경험인지 연륜인지 그 독성을 피해 여전히 장미들을 해치우고 있다. 말없는 꽃들의 서사 속에 단순한 이야깃거리를 주고, 그들만의  화려함으로 쉴 새 없이 아낌없는 기쁨을 준다.  속세의 고단함을 자연의 형언할 수 없는 색깔과 향기로 위로해 준다.


이제 싱그러운 여름이 다가오고 있다. 봄을 위로해 준 꽃들이 물러나고 화려하고 싱그러운 여름꽃들이 그 자리를 대신해 앞을 다투어 정원을 화려하게 수놓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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