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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이주 Mar 04. 2024

이희온

이주의 사람 시리즈 


나는 화장실 급한 척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화장실 입구에 있는 정수기에서 부러 물을 먹으며 3층을 살폈다. 강의실 327호. 논문 연구를 하는 선배들이 모인 방이었다. 괜히 327호 문을 슬그머니 열었다. 이희온 선배가 거북목으로 컴퓨터를 보다 빛이 새어 들어오는 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친하진 않지만 복도에서 마주치면 화사하게 인사를 해주는 선배였다.


”언니, 바빠요?” 

"지금 1학년 전공수업 아니야?”


“언니, 4학년 되면 어때요?” 대학에 들어왔으니 궁금은 했다. 하지만 졸업 앞둔 선배의 심상을 배려하지 않고 물을 만큼 간절한 주제도 아니었다. 그래도 왠지 언니는 무례함을 슬쩍 받아줄 것 같아 여기 눌러앉을 말을 꺼냈다. 강의실로 들어가지 않을 핑계를 찾아야 했다.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어. 뭐부터 듣고 싶어?” 선배는 신입생의 생경한 마음을 공감하는 것으로 시작해 학년이 바뀌면 만날 보편적인 고민을 나열했다. 내가 원하는 미래의 모습을 묻고 확인하면서 나에게 닿을 도움을 주려 했다. 대답 끝엔 “단지 내 생각일 뿐이야. 다른 선배들 말도 들어봐” 말을 더했다. 나의 가벼운 질문이 부끄러울 만큼 정성스러웠다. 스치는 인사에도 느껴지던 화사함은 타인과의 찰나도 진심이려는 노력 때문이었다.


나도 모르게 컴퓨터 옆에 쌓인 이면지 한 장을 집었다. 선배의 말을 적었다. 추천하지 않는 강의부터 꼭 들어야 할 강의, 챙겨 볼 자료, 유익했다. 고이 접어 주머니에 넣고 다시 정리해야지. 선배의 친절한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정신없이 휘 갈겨 받아 적었다. 선배는 자기가 방금 내뱉은 말이 이면지에 두서없이 적히는 걸 유심히 보다가 말했다.


“너 글씨 잘 쓴다”


글씨를 잘 쓴다고? 처음 듣는 말이었다. ‘잘’ 이라니 기분은 좋았다. 하지만 당황스러웠다. 보통 칭찬은 예상 가능한 것이지 않나. 내가 ‘잘’하는 걸 이미 알고 있거나 혹은 ‘잘’ 하려고 노력하는 것들. 친구들이 일제, 독일 펜을 사서 아기자기하게 글씨를 만들던 십 대 때도 나는 글씨 모양에 관심이 없었다. 글씨를 ‘잘’ 쓰는 건 내 노력의 범주에 들어간 적 없다. 보는 사람에게 적당히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바르게 쓰곤 싶지만 그렇다고 노력해야 하는 일이 되어 글씨를 쓰는 일조차 불편한 건 싫었다. 그거 말고도 노력할 건 많았다.


말하다 보니 글씨 모양뿐이 아니다. 생각을 무언가로 표현하는 과정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불완전한 내가 자연스럽게 드러났으면 했다. 완벽을 쫓는 일이 많아지는 건 싫었다. 삶에 강박이 많아질수록 나 자체로 머금은 가치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라는 핑계였다. 갑작스러운 언니의 ‘잘’ 칭찬에 기분이 좋았다.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칭찬받은 것이다. 잘하기 위해 애쓰는 걸 칭찬받는 것도 물론 좋다. 자신감, 성취감, 효능감. 당연히 좋다. 하지만 가공되지 않은 나의 태도가 타인에게 좋은 인상이 되는 건 긴장감에 절어 있는 삶을 가볍게 한다.


연이어 가벼움을 선사한 사람들이 떠오른다. “앉은 자세가 꼿꼿하고 바르네요” 탕비실에서 마주친 다른 부서 직원은 멍 때리며 믹스커피를 먹는 나에게 말했다. “집에서 좋은 냄새가 나요” 창문을 활짝 열고 솥에 밥을 안친 뒤 커피를 내리던 아침에 집에 찾아온 가스 점검 직원이 말했다. “털을 집에서 직접 미나 봐요.” 수의사는 고양이가 졸 때마다 야금야금 밀어 볼품없는 나의 고양이 털을 보고 웃었다. 미용보다 스트레스를 덜 받는 게 중요하다며 잘했다고 했다.


이희온 선배는 날 칭찬한 사람으로 각인되었다. 쓸데없는 걸 칭찬해 줬기 때문이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잘한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이면지에 적는 조언보다 적고 있는 네가 이미 잘하고 있다고 말해줬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응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과대 해석이어도 상관없다. 원래 뿅 가는 순간은 맥락이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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