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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상 Jul 22. 2023

성공한 축덕의 축역사

축덕이 되려면 션처럼 되어라

*주의* 이 글은 축덕이거나 FC서울/K리그 팬이 아니라면 무척 지루 할 수....도 있겠지만, 막상 읽어보면 꽤 재밌을 거예요. 믿어주세요!! 

언어가 아닌 것을
주고받으면서
이토록 치열할 수 있을까
침묵과 비명만이
극치의 힘이 되는
운동장에 가득히 쓴 눈부신 시 한 편
90분 동안
이 지상에는 오직 발이라는
이상한 동물들이 살고 있음을 보았다
 
- 문정희 시인, <축구>, 시집 <오라, 거짓 사랑아> 2001 민음사  




#2013 AFC 챔피언스리그 결승 2차전 

인천공항에서 함께한 응원단과 함께 찰칵

2013년 11월 9일 오전 6시, 나는 중국 광저우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중국에 가보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내 마음은 설렘보다는 긴장이 가득했다. 왜냐하면 이 비행기는 2013 AFC 챔피언스리그 결승 최종 2차전, 광저우 에버그란데 FC와 FC서울의 경기를 응원하러 적진 한가운데에 침투되는 파병 전세기였기 때문이다.


오후 4시경, 공항에서 숙소로 도착한 FC서울 원정 응원단은 근처의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음식이 회전 테이블에 올려지는 중식당이었다. 아차, 중국이니까 당연히 중식당이지, 따위의 멍청한 생각을 하면서 음식이 어느 구멍으로 들어가고 있는지 모를 밥을 먹고, 우리는 전세 버스를 타고 곧바로 결전이 펼쳐질 텐허 스타디움으로 향했다.

비행기서 보였던 텐허 스타디움과 AFC 챔스 결승전 티켓


2013년 아시아 챔피언스리그는 각자의 홈에서 1경기 씩 치르는 홈-어웨이 형식의 결승전이었다. 당시 중국 슈퍼 리그의 팀들은 중국 정부의 '축구 굴기'의 정책에 따라 거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세계 유수의 탑 플레이어를 스펀지처럼 빨아들이고 있었는데, 광저우 에버그란데는 모기업인 헝다 그룹의 서포트에 힘입어 당시 슈퍼 리그 1~2위를 다투는 클럽이었고, 굴라트, 헐크, 엘케손 등 당시 전/현직 브라질 국대를 영입하다 못해 귀화까지 시켜버린, 실로 무식한데 돈이 많아서 무서운 놈들이었다.
그래서 2013년 10월 26일 서울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FC서울과 광저우 에버그란데의 결승 1차전은 모든 전문가들이 광저우의 극 우세를 예상했다. 그러나 역시 축구공은 둥글었고, 오히려 FC서울의 주도적인 흐름 속에 2:2 무승부로 경기가 끝났다.


하지만 홈-어웨이 형식의 결승전은 1,2차전 모두 무승부로 끝날 경우 원정에서 더 많은 골을 넣은 팀이 우승한다는 원칙이 있었다. 때문에 홈에서 2골을 내준 FC서울은 중국 텐허에서 3골 이상으로 비기거나 승리해야만 하는 큰 부담을 안고 있었다.


광저우 에버그란데는 2010년 UEFA 챔피언스리그와 월드컵을 더블 우승한 경험을 가진 이탈리아 명장 마르첼로 리피 감독을 영입했다. 그리고 그 결과로 2012년 슈퍼 리그, 컵 대회를 더블 우승하며 수많은 홈 팬들을 양산하는 데 성공하는데, 이 사실을 입증하듯, 5만 8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텐허 스타디움은 FC서울 응원단을 위한 원정석 100석을 제외하고는 모두 광저우의 빨간 옷을 입은 홈 팬들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는 극성팬들의 극단적 행동을 대비한 현지 경찰의 삼엄한 에스코트를 받으며 원정석에 들어갈 수 있었다.


마침내 경기 시작의 휘슬이 울리고, 전반전은 굉장한 티키타카 속에 박진감 넘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박진감은 개나 줘버리라지,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점유율 10%도 좋으니 골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런 우리의 기대와는 다르게 전반은 무득점으로 끝났고, 후반 45분 내에 3골을 넣어야 하는 FC서울 선수단과 응원단은 습한 열대야 날씨와는 반대로 그야말로 가뭄처럼 바싹바싹 말라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후반 시작 후 8분, FC서울은 광저우의 브라질 국가대표 출신 엘케손에게 한 골을 허용당하게 된다. 이제 FC서울은 4골 이상으로 비기거나 승리해야 하는, 사실 객관적인 전력차를 대입한 일반적인 축구 경기 흐름을 고려하면 거의 달성이 불가능한 미션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나의 기억으로는, FC서울 선수들과 응원단은 절대 포기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2013년 리그와 챔피언스리그를 병행하는 FC서울에는 두 명의 절대적인 스타플레이어가 있었으니, 2011~2012 2년 연속 리그 득점왕, FC서울의 '그 녀석' 데얀과  2012년 리그 도움왕 몰리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명백한 FC서울의 리빙 레전드인 데얀이 FC서울 팬들이 홍길동이라도 된 것처럼 '그 녀석'이라고 부르게 된 이유는, 댓글에서 서울 팬들이 설명해 줄 것이다(도와줘요 스피드건!)


어쨌든 당시 우리의 믿을맨 데얀은 이 날도 후반 63분 동점골을 작렬시키며 아마도 대부분 몸치일 가능성이 높을(편견이다) FC서울 팬들에게 무지성의 희망 댄스를 시전 시켰는데, 그 반대편에서 또 다른 FC서울의 스타 한 명은 우리의 춤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어렵사리 찾은 희망을 무참히 깨트리고 있었다.

이 날 몰리나는 전반부터 말 그대로 개 헛발질을 일삼아서 FC서울의 팬들의 뒷목 혈류 흐름에 심각한 이상을 만들어주고 있었는데, 그렇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몰리나를 믿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2012년 K리그의 득점왕이자 2013년의 모든 리그 경기와 챔피언스리그 리그/토너먼트, 그리고 결승 1차전까지만 해도 정말 눈부신 활약을 펼쳐줬었기 때문이다.


현 시대 전세계 탑 10 플레이어 중 한명인 네이마르의 데뷔 시절, 몰리나가 그의 우상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 실제로 그는 데뷔 시절 몰리나의 백업 자원이었다.


그렇기에 후반전 2~3차례 있었던 결정적인 프리킥과 코너킥 기회에서 몰리나가 아주 섬세하게 공의 위치를 조정할 때마다 우리는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고, 온 마음과 힘을 다해 몰리나를 외쳐댔다. 그러나, 후반 44분 FC서울의 마지막 코너킥에서 몰리나가 올린 크로스가 반대쪽 터치라인 바깥으로 나가버리는 말도 안 되는 킥을 보며, 우리는 마침내 개비스X이라도 먹은 마냥 편안-하게 패배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렇게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고, 우리 원정단은 마법처럼 5만 8천 명의 광저우 팬들이 내뿜는 엄청난 함성에 귀가 멀어버렸다.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그 순간이었기 때문에, 경기장 전광판에 그려진 FC서울의 엠블럼과 한글이 한 번에 이해되지가 않았다. 전광판에는 바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FC서울의 준우승을 축하합니다."

????????????????????????????

FC서울 팬이 아니었던 축구 기자님마저 열폭했을 정도면 FC서울 팬들 기분은 어땠을 지 상상해보라. [이미지 출처: https://melburn119.tistory.com/394]

나는 사실 착한 사람이었다. 평소 욕도 별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날을 기점으로, 나는 비로소 '욕'의 필요성과 욕의 근원적 힘을 깨달았다. '이런 개XX 호로자식 조빱 새X들이 %&&#$%#@!$!@#$!' 라고 내가 알고 있고 모르더라도 최대한 창의력을 발휘하면서 욕을 지껄이며, 우리는 무거운 마음으로 경기장을 퇴장했다.


비록 2013년 FC서울의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도전은 준우승에 그쳤지만, 나에게 있어 이 한 경기는 내가 FC서울의 팬으로 영원히 박제되는 아주 소중하고 중요한 순간이었다.



#FC서울 팬의 탄생 

머리 크기와 공 크기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을 보라(?).

인간 션은 태어났을 때부터 FC서울의 팬은 아니었으나 태어났을 때부터 축구 팬인 것은 분명했다. 기억도 나지 않는 4~5살 때의 내 사진들은 축구공을 들고 있는 사진이 많았고, 아버지가 근무하시는 서울 광진구 성동 초등학교의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불합리하게도(?) 아버지의 출근 스케줄에 따라 7시 반에 등교를 했는데, 당연히 나는 슛 볼은 나의 친구, 아무도 없는 교실보다는 매일 아침 공 하나를 들고 흙바닥에 나가 공을 차는 것을 선호했다.
내 슈팅 감각은 그 당시에 이미 완성되어가고 있었는데, 그 어린 초딩이 아침마다 하는 것은 단순히 개처럼 뛰어다니는 것이 아니라 '공의 어느 부분을 차면 공이 얼마나 휘어서 어디만큼 날아가는가'를 연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로, 초등학교 5학년, 80년대 대한민국 어른들이 어린이를 만나면 하는 이상한 인사법인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니?'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던 나는 축구 선수가 되고 싶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엄마를 통해 차범근 축구교실에 가보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한다. 하지만 돌아오는 아버지의 대답은 차가웠다.
성동 초등학교는 예나 지금이나 수많은 프로야구 선수들을 배출해 내는 '야구 명문초'였는데(그 한 예로 내 5학년 반 친구 중 하나가 기아 타이거즈의 원클럽맨 나지환이다) 아버지 역시 스포츠 쪽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초등학교 선수들마저 얼마나 경쟁이 심하고 혹독한 훈련을 받는지 알고 있었다. 축구 선수를 반대하는 이유로 아버지는 나에게 예시를 하나 들어줬는데, 어떤 성동초 야구선수는 훈련하기가 싫어서 스스로 다리를 부러트리고 병원에서 휴식을 취했다는 식의 이야기였다.


실화인지 뻥카인지 모를 이야기에 안 그래도 아버지를 무서워하던 나는 너무나도 쉽게 내 꿈을 접었고 다시는 축구선수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게 된다. (그 대신 40살을 바라보는 지금도 축구를 한다)


아버지의 거부가 충격이었던 것인지, 중고등학교 때 나는 생각보다 축구에 소원했고, 대신 만화를 좋아했던 나는 수 2에 질린 나머지 고2 2학기 중간고사가 끝난 후, 미대에 가겠다고 폭탄발언을 내뱉는다. 그리고는 다시 되짚어봐도 무서울 정도의 집중력으로 미대 입시를 준비한 나는 거의 정확히 1년 뒤, 수시로 홍익대학교 서울 캠퍼스 시각디자인과에 합격한다. 마침내 도비를 얻게 된 자유는 과 내 축구동아리에 가입하여 졸업할 때까지 그야말로 폭풍과 같은 활약.. 이라기 보단 어쨌든 열심히 다시 축덕 라이프를 시작하게 된다.


'축구는 보는 게 아니라 하는 것'이었던 나에게 전환점이 된 것은 2010년 경이었는데, 당시 나는 축구를 하다가 발목을 접질려서 축구를 못하게 되자,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사고회로인지는 몰라도 '축구를 못하니까 그럼 축구를 봐 볼까?' 하는 생각으로 홍대와 가까운 상암 월드컵 경기장의 FC서울 경기를 보러 가게 된 것이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2010년 당시 FC서울은 2007~2009년 투르키예 귀네슈 감독의 훌륭한 지휘력과 당시 20대 초반임에도 K리그의 신성이자 스타였던 이청룡, 기성용의 쌍룡 마차 덕분에 창단 이후 최고 리즈 시절을 보내고 있었고, 후임이었던 빙가다 감독도 준수한 경기력으로 2010년 K리그 우승을 일구어 냈었다.

내 관점에서 다시 말하자면, 케린이었던 내가 축구장에 갈 때마다 2:0 이느니 4:1 이느니 하는 직관=승리라는 말도 안 되는 야바위(?)를 꾸준히 보여준 덕분에, 나는 점점 K리그 덕후의 구렁텅이로 서며 들고 있던 것이다. 인생은 항상 타이밍이 문제인데, 말 그대로 나는 FC서울의 팬이 될 운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겠다. 이후로도 계속해서 상암을 찾은 나는 점점 FC 서울팬으로써의 자아가 형성되게 된다.


#K리그가 뭐예요?

2010년대는 박지성이나 이영표, 설기현 등의 전설의 선수들이 EPL에서 전성기를 보내던 시기였다. 그래서 내가 일요일에 대학교 선후배들과 축구를 하러 가면, 하프타임 때 보면 다들 밤을 샌 뻘건 눈으로 EPL에 대해서 침을 튀기는 게 일상이었다. 재밌게도 당시에는 제한박응이 싫었는지 맨유를 제외한 다른 EPL 팀이나 스페인 리그의 팬이라며 '전 박지성이 아니라 XXX의 팬이에요!'라고 말하는 친구들이 종종 있었는데, 나의 사고로는 가본 적도 없고 나랑 연관이 전혀 없는 해외 팀의 팬이 된다는 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래서인지 내가 FC서울의 팬을 하기로 스스로 결심했을 때, 태어나서 30년 이상 살아온 고향이자 내가 다니던 대학교에 인접한 로컬 축구팀의 팬이 된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굉장히 설득력 있고 자부심 있는 선택이었다.


그러니, 문제는 내가 아니라 다른 축구팬들이었는데, 2010년대 일반적인 축구팬들에게 '저는 K리그 팬이에요'라고 자기소개를 하면, '아 네.....'라는 답변과 'K리그 보는 사람이 진짜 있네?'라고 중얼거리는 게 열에 아홉이었다.


지금과는 달리 K리그 팬은 정말 가뭄에 콩 나듯 나고 있었고(대신 FC KOREA 팬들은 많았음), 덕분에 나는 항상 경기를 보러 갈 때 혼자였고, 골을 넣은 뒤 하는 오오렐레 세리머니(주변 사람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앞뒤로 흔드는 응원)도 혼자 하는 것이 무척 외로웠다. 그래도 당시 FC서울이 평균 관중수가 1만이 넘었고(참고로 서울의 인구수는 천만이다) 나름 많은 사람들이 K리그를 즐긴다고 생각했기 때문에(사실이 아니다) 주변에 FC서울 팬들이나 K리그 팬들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지만, 그것은 정말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비슷한 확률이었다.

그런데 그러던 중 나는 우연히 알게 된 두 명의 어여쁜 K리그 팬인 여자분들과 몇몇 경기를 함께 직관을 하는 행운을 경험하는데, 내가 축덕이기 때문에 축덕인 여자친구를 찾고 싶었던 나는 그들과 연애를 하고 싶었으나 연애의 ㅇ근처에도 못 가보고 대차게 까이게 되자, 그 이후부터는 독기를 품고 이러한 목표(X, 집착 O)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내 미래의 와이프는 무조건 축덕이어야 한다!'


#Dreams Come Ture!

이윽고 2014년, 나는 현재의 와이프를 만나게 된다. 달리기 모임에서 알게 된 그녀는 내가 만나본 어떤 여자보다 예뻤고, 상냥했으며, 무엇보다 스포츠를 좋아했다! 말 그대로 첫눈에 사랑에 빠진 나는(원래 나는 금사빠의 성향이 강했다) 정말 운이 좋게도 그녀와 연애를 시작했고, 오래되지 않아 나의 배우자 선택 기준 중 하나인 '축덕 테스트'가 시행되었다. 테스트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 축구를 좋아하는가? (적어도 싫어하지 않는다면 Pass)

• 나와 함께 축구장에 가줄 수 있는가? (거부하지만 않는다면 Pass)

• 축구에 대한 기본적인 룰을 알고 있는가? (Off-side에 대해 들어봤으면 Pass)

• K리그에 대한 편견이 없는가? (K리그를 아예 몰랐다면 Pass)


놀랍게도 그녀는 모든 문항을 Pass 하는 뛰어난 축덕력을 보여줬고, 이 사람과 결혼해야겠다는 근거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나도 못 가본 FC 바르셀로나의 홈구장, 캄 노우도 가봤다! 축덕 출신인 예비 남편의 입장에서, 당시 이 사진이 얼마나 멋져보였을지 상상이 되는가?

2016년, 마침내 나는 그녀와 결혼했고, 이제부터 내 축덕 라이프에는 항상 그녀가 함께할 것이라고 믿었으나... 그녀에게는 당연하게도 축구보다는 2017년 우리에게 찾아온 아기가 먼저였고, 나는 또다시 몇 년간 혼자서 축구장에 다닐 수밖에 없었다. (물론 예전처럼 시즌권을 끊어서 가는 것은 아니고 1년에 1~2번 갔다)



그리고 바야흐로 육방부 시계는 돌고 돌아 2022년, 나의 소중한 딸인 솔이가 6살이 되자 나는 슬슬 이 녀석한테 조기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르렀고, 5월 27일 인천 유나이티드 전에 전격적으로 이솔이를 선발 출전시켜 보기로 마음을 먹게 된다.

선발 출전 명단에 오른 것을 듣고 기뻐하는 솔이.


생에 첫 개막전에 이솔이는 무려 약 20분이라는 괜찮은 경기력으로 교체 아웃되는 준수한 경기력을 펼쳤다. 다시 말해, 20분 만에 경기장에서 나가자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는 것인데, 이솔이가 진정으로 효녀가 맞다는 증거로 그날 경기는 우리 가족이 경기장이 나온 직후인 28분과 54분 두 골을 얻어맞고 졌다. (예지 능력이 있는 솔이는 아빠에게 그 몹쓸 꼬라지를 보여주기 싫었던 것이 분명하다)


어쨌든 축구가 뭔지도 모르는 아이에게 그 정도 시간을 버틴 것은 나에게 굉장히 희망적인 경험이었으며, 이윽고 2023년 5월 22일, 수원 삼성과의 슈퍼매치에 두 번째 선발 출전 명단에 올리게 되는 근거가 된다.

이번에는 이겼다!!

다시 한번 이솔이가 진정으로 효녀가 맞다는 증거로, 이번 슈퍼매치 때는 이솔이가 후반 15분까지 버티고 나왔는데, 덕분에 그날 경기는 전반 48분 나상호의 선제골과 후반 8분 황의조의 추가골까지 보고 나올 수 있었으며, 경기 결과는 3:1로 대승을 거뒀다.


따사로운 오후 늦은 햇살을 받으며 경기장에서 걸어 나오던 그때, 나는 축덕이 성덕으로 승급했음을 깨달았다.


#축덕이여 영원하라

나에게 축구는 말 그대로 나의 삶의 일부이며, 종교이자 철학이다. 아마 축구가 없는 션의 삶에는 남은 것이나 남을 것이 별로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의 축덕 라이프는 계속될 것이다.


이 글을 모든 FC서울 및 모든 K리그 팬들에게 바칩니다.
우리 모두 성덕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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