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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시 Jul 05. 2022

이젠 새로운 곳이 없지 않나요?

쥘 베른. 『80일간의 세계일주』. 열림원(2022)

  열림원에서 쥘 베른의 가장 사랑받는 11개의 작품을 꼽아『쥘 베른 베스트 컬렉션』을 출간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지구 속 여행』부터 파리대왕과 비교하고 싶은『15소년 표류기』, 제목만으로도 두근거리는 『신비의 섬』과 『달나라 탐험』등이 포함되어 있다. 원래 빨간 바탕에 판화를 넣은 표지가 150여 년 전에 나온 쥘 베른의 모험 이야기를 잘 표현한 최고의 표지라고 생각하지만, 이번 컬렉션의 표지는 이젠 성인이 된 독자들이 '모험'이라는 타이틀에 숨겨졌던 쥘 베른의 뛰어난 작품세계와 작가로서의 면모를 들여다보자는 의미같아 더욱 뜻깊게 다가온다. (물론 완전히 개인적인 해석이고, 어릴 때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 쥘 베른의 독자라는 점이 문득 자랑스럽게 느껴져 붙인 사담이다.)


(스포주의)


  『80일간의 세계일주』읽은 사람은 많지 않아도 제목과 대략적인 줄거리는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80일 동안 세계일주를 한다는 것, 내기로 시작했고 결국 내기에 승리했다는 것 말이다. 아마 중학생 때 처음 읽었던 것 같은데 그 때는 사실 다른 작품에 비해 좀 지루하게 느껴졌었다. 잘 알지 못하는 나라와 지역들에 대한 설명이 재미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에 비해) 조금 아는 게 늘었다고 어떤 경로로 가고 있구나, 이 나라는 이런 역사가 있었지, 당시에 이런 모습이었겠구나 하는 것들이 생기다보니 오히려 여행하는 지역에 대한 묘사 부분이 참신하고 즐겁게 다가왔다. 소설이지만 기행문만큼 독자들을 상상하게 하는 사실적이면서도 상세한 설명이 당시 사람들의 가슴을 얼마나 뜨겁게 했을까.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짜 신사 필리어스 포그는 자신이 속한 혁신 클럽의 회원들과 카드 게임을 하면서 흥미로운 주제로 토론을 하게 된다. 은행에서 거액을 턴 도둑이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 도망칠 수 있을 것인가로 시작된 이 주제는 '지구가 작아졌다'라는 말로 이어지며 <모닝 크로니클>지에서 제시한 80일간의 세계일주가 가능할 것인가로 이어진다. 포그는 가능하다고 단언을 하며 내기를 제안하고, 그 즉시 하인 파스파루트를 데리고 세계일주를 떠난다. (처음 고용될 때 4분 느린 시계를 착용하고 있던 파스파루트, 도둑이 세계의 어디로든 도망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의견 등 초반에 던져놓은 복선들을 작품 전체에 걸쳐 깔끔하면서도 명쾌하게 회수하는 위트는 작품을 여러 번 읽게 하는 쥘 베른의 매력포인트)

  아프리카에서 인도, 중국과 일본, 미국 그리고 다시 영국. 그야말로 지구를 가로지르는 포그와 파스파루트, 픽스 형사와 아우다 부인의 여행은 '80일'이라는 조건으로 독자들의 손에도 땀이 나게 할만큼 긴박하고 스릴 넘친다. 핸드폰으로 전 세계의 정보를 실시간으로 받아볼 수 있는 지금도 여행지에서 닥치는 예측할 수 없는 위험과 사고들이 터지기 마련인데, 150여 년전의 세계일주? 말을 해서 무엇할까. 완공된 줄 알았던 철도는 도중에 끊겨있고, 돈을 가진 주인과 수족인 하인은 국가를 넘나드는 여행에서 연락책도 없이 떨어지게 되며 열차를 습격한 강도무리와 총싸움을 하면서 살아남아야 하는 '빡센' 모험이지만 '80'일의 시간은 이들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포그씨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는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원주를 그리고 있을 뿐이었다. (89쪽)

  보통의 사람이라면 당황하고, 불안하고 막막할 텐데 주인공 포그는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독자를 안심시키는 주인공이 아니라 '대체 이놈은 뭐하는 인간인가' 싶을 정도로 오히려 다른 불안을 이끌어내는 주인공. 사실 이 포그에게 작품의 마지막까지 애정을 갖게 되는 그런 매력은 느끼지 못했지만 80일의 세계일주라는 불가능할 것 같은 업적을 달성해내려면 이런 인간이어야지 않을까 하는 작가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런 괴짜와 함께 다니며 포그의 정직함과 정의로운 성정에 감명받는 인물들에 대부분의 독자도 감화되지 않았을까 싶다. 왜 침착한지 모르겠는 포그씨와 곁에서 때때로 놀라운 기지를 발휘하는 개성있는 동행들은 그들의 위대하면서도 불가능한 모험을 응원하게 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시대상황을 볼 수 있다는 점은 성인이 되어 다시 읽었을 때 가장 크게 느꼈던 매력 중 하나였다. 무수한 나라들을 식민지로 지배했던 영국의 영향력이 작품 곳곳에 드러나는데, 이를 마냥 부정적으로도 긍정적으로도 보긴 어렵지만 어찌됐든 역사책에 '영국의 식민 지배'라는 구절보다 훨씬 살아숨쉬는 장면으로 다가온다.

이 훌륭한 젊은이가 항구로 가면서 본 것은 이번에도 역시 봄베이나 캘커타나 싱가포르와 거의 비슷한 풍경이었다. 영국 도시들이 길게 꼬리를 끌면서 지구를 돌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177쪽)

  이외에도 문제가 닥쳤을 때 큰 돈을 턱턱 내며 해결하는 포그씨의 행동을 '경제지상주의'로, '작아진' 세계를 '소유'한다는 현대적 감각으로 연결지을 수 있다는 김석희 역자님의 해설은 왜 쥘 베른의 소설이 21세기인 현재에도 가치를 갖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요즘은 고전을 읽을 때 작품 자체의 번역도 중요하지만 해설도 반드시 고려하는 요소가 된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쥘 베른의 작품은 김석희 역자님을 섭외한 열림원 버전을 강력 추천한다.)

  

  쥘 베른의 모험이야기가 왜 좋을까. 장면이 자연스럽게 상상될 만큼 뛰어난 묘사와 (당시의) 진일보한 과학적 발견 및 기술들을 결합해 설득력있는 설명으로 그저 환상에 지나지 않고 가능성을 보인다는 점이 쥘 베른만의 대체할 수 없는 매력이다.

  더 이상 모르는 것도, 새로울 것도 없다는 세상이지만 여전히 우리는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것들에 도전하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에 이제 막 세상이 열린 쥘 베른의 소설 속 모험가들에 열광하는 것이 아닐까. 가슴뛰는 짜릿한 신세계에 대한 감동을, 신념을 위해 기꺼이 내던지는 용기를 배울 수 있는 건 역시 쥘 베른뿐인 것 같다.

  

  

* 열림원으로부터 책을 제공받았지만, 글은 필자가 완전히 솔직하게 쓴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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