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오빠, 나의 상처를 함께 짊어지고 가는 이름
“오빠, 이걸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이 오빠밖에 없어... 오빠.... 내가 그렇게 맞을 짓을 많이 했었어? 엄마가 나를 심하게 때릴 만큼 내가 잘못을 그렇게 많이 했었어?
내가 정말 나쁜 아이였어?”
정말 물어볼 사람이 오빠밖에 없었다.
두 살 차이.
당연히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때부터 나와 함께 있었고 그래서 나를 더 잘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물론 이런 질문을 오빠에게 던지는 것이 오빠를 아프게 하는 일인 줄 알고 있었다.
정말 미안했지만 그래도 듣고 싶었다.
전화기 너머 오빠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오빠가 속으로 삼키고 있는 대답을 기다리는 게 무섭고 두려웠다.
혹시라도 ‘그래, 네가 나빴어. 넌 늘 엄마에게 맞을 짓을 했어’라는 말을 듣게 될까 봐.
“....... 흐흑.......”
한동안 말이 없었던 오빠가 대답 대신 울음을 터트렸다. 그때의 기억들이 떠올라서, 그 시절의 자신과 나에
대한 기억들이 아프게 오빠의 가슴을 헤집었나 보다.
“미안해”
오빠의 말에 결국 나도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오빠와 나는 어른이 된 지 한참이 지났지만 여전히 어린 시절의 오빠와 어린 시절의 나를 가슴에 품고 그 상처에 아파하며 살아가고 있다.
오빠가 미안해할 일은 없었는데, 왜 오빠는 아직까지도 나에게 미안해하는 걸까?
내가 기억하는 오빠는 공부도 잘했고, 착했고, 엄마 아빠를 실망시킨 적이 한 번도 없는 정말 모범적인 사람이다. 착하고 다정했던 오빠는 소풍이나 수학여행을 다녀오면 나를 위해 손수건이나 에델바이스 액자를 사다 주기도 했다. 내 생일에 시집을 선물해 준 사람도 오빠였다. 그때 우리는 정말 돈이 없었는데... 돈뿐만 아니라 마음도 너무나 가난했는데 오빠는 어떻게 나에게 그리 잘해 줄 수 있었을까....
오빠에 비해 나는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는 못난 아이였다. 예민했고 신경질적이었고 몸도 많이 작았다.
중학교 2학년 때 허리가 18인치였다. 아동복을 입어도 헐렁했다.
밥 먹는 모습, 걷는 모습, 심지어는 잠자는 모습까지도 엄마 마음에 들지 않았던 나를 엄마는 종종 욕을 하며 뺨을 때렸고 머리채를 잡아 벽으로 밀쳤다. 쓰러져 울고 있으면 허리를 걷어찼다.
그냥 나의 존재 자체가 싫었던 엄마는 ‘너는 왜 나가서 죽지도 않고 이렇게 꼬박꼬박 집에 들어오냐’며 한탄을 하셨다. 엄마 말대로 죽어 사라졌어야 했는데 나는 살아있는 내가 참 싫었다.
사실 내가 진심으로 사과해야 할 사람은 오빠다.
한차례 엄마의 폭력을 당해 내고 나면 그 상처를 때때로 오빠에게 풀었다. 사소한 일에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아 오빠에게 짜증을 냈고 책을 집어던지고 얼굴에 상처를 냈다.
지금도 오빠의 얼굴엔 내 손톱자국이 남아 있다.
그런 나에게 오빠는 미안하다고 한다. 아직도 미안하다고. 맞고 있던 어린 나를 지켜주지 못해서. 그 상처로 오랫동안 아파하는 데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해서.
“아니야 오빠. 나에게 미안해하지 말아 죠.
아니 내가 더 미안해.
내가 이렇게나마 온전히 살아갈 수 있는 건 그 시절 내 곁에 오빠가 있었기 때문이야.
오빠가 있어서, 내가 인식하는 것 이상으로 나에게 많을 걸 베풀어주었기 때문에 내가 사라지지 않고 지금도 살고 있어. ”
내가 엄마와 인연을 끊기로 마음먹었던 그 마지막 폭력의 시간에 공교롭게도 오빠는 없었다.
그날 오빠는 다른 일이 있어서 집에 늦게 왔고 나를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오빠에게 훗날 나의 결심을 전달하는 게 무척 힘들었다.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고 누구도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오빠가 만약 겨우... 고작... 뒤통수 한 대 맞은 걸로 엄마와의 인연을 끊으려고 하냐며 화를 낸다면 난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것 같았다.
그때도 오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난을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았다. 대신 함께 아파해줬다. 부모님과 연락을 끊었지만 오빠와는 가끔 연락하고 만나기도 한다. 세상에 나 혼자 남겨지지 않았다는 걸 오빠를 생각하며 감사해한다.
내가 살아있는 건 많은 부분 오빠 덕분이다.
고마워 오빠.
정말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