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리고 책 Dec 25. 2021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그 책의 마지막 문장 -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

“작가님 글에는 임팩트가 없어요. 내용도 뻔하고... 다시 써 주세요.”


그런 말을 들었다. 

내가 맡고 있는 프로그램은 특성상 짧지만 강력한 메시지 전달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니 피디의 이런 요구는 어쩌면 정당했다. 

다만 개탄스러운 건 내 능력을 아무리 짜고 또 짜내도 그런 임팩트 한 방울을 더 이상 만들어 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마음을 다잡아 세 번을 새로 써서 보냈지만 

여전히 내 원고는 그냥 넘길 수 없는 상태였나 보다. 

마침내 서로의 한계점이 찾아왔고 

한동안 침묵한 후 나는 솔직하게 인정했다. 

나는 임팩트가 없는 작가라고.  

그리고 덧붙였다. 

그런 능력을 가진 작가와 일하는 게 좋겠다고.      


사실 나는 그녀라는 사람을 그리고 그녀가 갖고 있는 능력을 참 좋아했다. 

작업을 하는 동안은 살얼음판을 건너듯 위험할 때도 있었지만  

완성해 낸 결과물은 좋았기에 그 과정들을 견딜만했다. 

그런데 더 이상은 참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참지 않는 편을 택하기로 마음먹었다.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을 한 후, 착잡한 마음에 허먼 멜빌의 단편 소설 ‘필경사 바틀비’를 찾아들었다. 소설 내내 바틀비가 선언하듯 내뱉은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가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이다. 

     

필경사는 복사기가 생겨나기 이전에 오로지 사람의 수고로 문서를 복사해 냈던 시대에 존재했던 직업이다. 원본을 그대로 옮겨 적으면 그 글자의 수대로 임금을 받았다고 한다. 소설 ‘필경사 바틀비’는 본래 1인칭 관찰자인 변호사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나는 바틀비의 시점으로 다시 읽어보았다.   





어느 날 청년 바틀비는 구인 광고를 보고 월 스트리트에 있는 한 변호사 사무실에 찾아간다. 중년을 넘긴 원만한 성격의 변호사는 ‘두드러지게 조용한 풍모를 가진’ 바틀비가 마음에 들어 그 자리에서 채용을 결정한다. 바틀비는 처음엔 무서울 정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놀라운 분량의 필사를 해치웠다. 묵묵히, 창백하게, 기계적으로 필사를 해 나가던 바틀비. 그런데 변호사가 필경사의 두 번째 직무인 정확도 검사를 요구하자 뜻밖의 대답을 한다.      


바틀비가 그의 은둔처에서 나오지 않고 매우 상냥하면서 단호한 목소리로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랐을지, 아니 당황했을지 한번 상상해보라. 
나는 충격받은 감각기관들을 추스르며 잠시 완벽한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곧 내가 뭘 잘못 들었거나, 바틀비가 내 말뜻을 완전히 잘못 알아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가 취할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어조로 요구를 반복했다. 그러나 그만큼 분명한 어조로 그 전과 같은 대답이 되돌아왔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바틀비의 단호한 대답에 변호사도, 함께 근무하는 다른 필경사들도 충격을 받게 된다. 동료들은 변호사에게 바틀비가 필경사의 마땅한 책임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따끔하게 일깨워줘야 한다고 부추긴다. 하지만 본래 원만한 성격의 변호사는 인내심을 발휘해 바틀비를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우체국 업무나 동료를 불러오는 일, 하다못해 우편물을 끈으로 묶는 과정에서 한 손으로 물건을 붙잡아달라는 사소한 부탁마저

 “안 하는 편을 택하겠다” 는 대답이 돌아오자 그의 인내심은 바닥을 치고 만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지나가는 길에 잠시 사무실에 들린 변호사는 그 상업적인 공간에 바틀비가 숨어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당혹스러움과 분노 그러나 한편으로 인간적인 안쓰러움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변호사는 무엇보다 바틀비에게 가족이나 친척, 친구조차 없다는 것에 동정심을 갖게 된다. 그리고 조금 더 안간힘을 내 바틀비를 이해해 보려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그의 행동에 굴욕감을 느꼈지만 그리고 그를 해고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사무실에 들어갔지만, 이상하게도 미신적인 무언가가 내 가슴을 두드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내가 계획한 것을 실행하지 말라는 듯했고, 내가 만일 모든 인간 중에 가장 쓸쓸한 이 사람에게 감히 한마디라도 모진 말을 내뱉기라도 하면 악한으로 매도되리라는 듯했다. 마침내 나는 스스럼없이 내 의자를 그의 칸막이 뒤로 끌고 가 앉은 다음 말했다. 
“바틀비, 그럼 자네의 개인사를 밝히는 건 없던 일로 하세. 하지만 친구로서 자네에게 간곡히 부탁 하네만, 이 사무실의 상례만큼은 따라주게. 자 말해보게. 내일이나 모레부터는 서류 검증을 돕겠다고. 요컨대, 하루나 이틀 후부터는 좀 더 합리적인 사람이 되겠다고 지금 말하게... 바틀비, 그러겠다고 말하게.”
“지금은 좀 더 합리적인 사람이 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이것이 주검같이 맥없고 침울한 그의 대답이었다.      


바틀비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한다. 필경마저도. 

처음엔 난감했다가 이내 분노하고 마침내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결심한 변호사는 바틀비에게 해고를 통보하지만 바틀비는 여전히 아무것도 택하지 않는 편을 선택한다. 

더 이상 어떻게 해도 바틀비를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 변호사는 새로운 사무실을 구해서 이사를 떠난다. 빈 사무실에 오직 바틀비만 남겨둔 채.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을 택한 바틀비. 이 소설의 결말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그런 비극으로 막을 내린다. 그럼에도 변호사는 (아니 저자인 허먼 멜빌은) 바틀비에 대한 애정을 끝까지 거두지 않고 있다. 아니, 오히려 그를 더 이해하고자 애를 쓴다.      


소문은 이렇다. 바틀비는 워싱턴의 사서 우편물계의 하급 직원이었는데, 관련 행정기관에 뭔가 변경되는 게 있어서 갑자기 해고를 당했다. 이 소문을 곰곰이 생각할 때 나를 엄습하는 감정은 제대로 표현할 길이 없다. 사서(死書)라! 사자(死者)처럼 들리지 않는가! 날 때부터 그리고 운이 나빠서 창백한 절망에 빠지기 쉬운 사람을 상상해보면, 끊임없이 사서를 취급하고 분류해 불태우는 것보다 더 그 절망을 키우는 데 적합해 보이는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사서(死書). 말하자면, 발신자나 수신자의 주소가 잘못 기재됐거나 보내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 사망해서 발송도 반송도 안 되는 배달 불능의 우편물을 책임져 온 바틀비. 


허먼 멜빌이 왜 이런 인물을 만들어냈는지 궁금해서 자료를 찾아봤다.  


이 소설은 1853년에 발표됐다.

그의 대표작인 ‘모비 딕’과 ‘피어’가 혹평도 모자라 악평을 받은 후에 집필된 작품이었다. 게다가 이 소설이 발표되기 전 허먼 멜빌의 팔리지 않은 작품들을 보관하고 있던 출판사의 창고에서 불이 나 그는 자신의 피 같은 작품이 불타 없어지는 기막힌 경험을 했다고 한다.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못지않게 모든 일을 안 하는 것을 택한 바틀비는 그 누구도 아닌 멜빌 그 자신이었겠구나. 희망을 한 조각도 가질 수 없었던 그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안 하는 편을 택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바틀비 못지 않게 멜빌 그도 지독하게 운이 없는 사내였으며 작가였으니까.      


'필경사 바틀비'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아, 바틀비여! 아, 인류여!' 


멜빌의 탄식을 가만히 흉내 내 봤다. 




나는 오늘 좀 더 합리적인 사람이 되지 않는 편을 택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순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택했다. 

그 결정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조금 더 지켜볼 일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혹시, 제사 증후군이라는 몹쓸 병을 알고 계신가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