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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고 책 Jul 15. 2024

여름의 맛! 추리소설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어쩌면 요즘의 독자들에게는 정형화된 인물 구도와 교과서적인 전개로 인해 다소 지루한 작품으로 다가올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거서 크리스티가 ‘추리소설의 여왕’이라는 걸 부정할 사람은 없을 거예요. 당연히 그녀에겐 보석처럼 빛나는 작품들이 수없이 많지만 그 가운데 그녀에게 왕관을 안겨준 작품으로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꼽고 싶습니다.    

  

   요즘엔 밀실 살인을 추리소설의 흔한 장치 중 하나로 꼽지만 이 작품이 발표된 1939년에는 이만큼 치밀하게 밀실 살인을 완성해 낸 작품은 드물었다고 합니다. 당시 크리스티의 라이벌로 꼽혔던 엘러리 퀸은 이 작품을 읽고는 이미 완성한 작품의 발표를 취소하고 폐기해 버렸다고 해요.    

  

  물론 밀실 살인을 다룬 추리소설이 수없이 많지만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최고로 꼽는 이유는 작가인 애거서 크리스티의 매력이 최고로 발휘됐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작품은 의학 지식이 없어도 쉽게 납득할 수 있고 살인을 다루고 있음에도 과격한 장면이나 잔인한 내용이 많지 않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지요. 그리고 제가 덧붙이고 싶은 또 한 가지는 많은 사람들이 추리소설을 문학보다 낮게 평가하지만 그녀의 문장은 그 어떤 작가보다 간결하고 담백하며 문학적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첫 문장을 만나볼까요.     




  최근 판사직에서 물러난 워그레이브 판사는 흡연자용 일등칸 구석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흥미로운 눈길로 ‘타임스’의 정치면을 훑어보고 있었다. 

  그는 신문을 내려놓고 창밖으로 눈길을 던졌다. 기차는 서머셋을 지나고 있었다. 그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앞으로 두 시간을 더 가야 했다.      

  


  

혹시 앞으로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을 읽을 계획이라면 꼭 첫 문장을 꼼꼼히 읽어보시길 권하고 싶어요. 첫 장에 많은 힌트가 담겨 있거든요. 그리고 그녀의 작품에 허투루 등장하는 인물은 하나도 없다는 점도 잊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피해자와 용의자, 증인과 사건을 풀어나가는 경찰관 등등 등장인물들 사이의 관계와 이야기들이 하나하나 펼쳐지는 과정이 정말이지 매혹적이죠.      




이상하군요저거 말이에요그렇지 않아요?”

둥근 식탁 한가운데에 놓인 회전 유리판 위에 도기로 된 꼬마 인형들이 

놓여 있었다

토니가 말을 이었다

병정 인형들이네병정 섬이니까그래서 놓아둔 것 같은데요.”

베라가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런 것 같군요모두 몇 개죠열 개?”

베라는 감탄했다.

정말 재미있군요쟤네들은 자장가에 나오는 열 꼬마 병정 같아요제 방 벽난로 선반 위에는 그 노래의 가사가 쓰여 있는 양피지가 액자에 들어 있어요.”

롬바드가 말했다.

제 방에도 있던데요.”

내 방에도.”

내 방에도.”

모두들 입을 모아 말했다베라가 말했다.

재미있는 생각 같지 않아요?”

워그레이브 판사가 못마땅하다는 듯 투덜거렸다.

유치하기 짝이 없군.”

그러고 나서 그는 자기 잔에 포도주를 따랐다    


 



  국적과 나이를 뛰어넘어 누구나 흥얼거릴 수 있는 동요 ‘열 꼬마 인디언’의 원가사가 추리소설의 모티브가 될 정도로 잔인하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 몇 이나 될까요? 이 작품이 흥미로웠던 이유는 익숙한 동요의 잔혹한 이면 때문이었습니다.      


  음.... 물론 너무나 오랫동안 사랑받은 작품이고 내용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아직 읽지 않은 분들을 위해서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이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준 책 속의 한 장면을 전해드릴게요.      




워그레이브 판사님워그레이브 판사님어디 계십니까?”

대답이 없었다크지 않은 빗소리를 제외하면 집 안은 괴괴한 침묵에 싸여 있었다.

이윽고 응접실 입구에 도착한 암스트롱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다른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의 어깨너머를 바라보았다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워그레이브 판사는 방 한구석에 놓인 등 높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두 개의 촛불이 그의 양쪽에서 타오르고 있었다하지만 사람들을 가장 놀라고 소스라치게 한 것은 진홍빛 옷을 입고 머리에는 판사용 가발을 쓰고 있는 그의 모습이었다

암스트롱 박사가 손짓으로 사람들을 물러나게 했다그는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요란한 차림으로 말없이 앉아 있는 판사에게 다가갔다.

그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움직임이 없는 판사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그런 다음 가발을 휙 들어 올렸다. 가발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머리카락이 빠지고 없는 앞머리 위쪽 중앙에 둥글게 얼룩진 자국이 드러났다거기에서 뭔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암스트롱 박사는 축 늘어진 판사의 손을 들어 올려 맥박을 짚어보았다이윽고 그는 다른 사람들을 향해 돌아섰다

그가 입을 열었다아무런 감정도 실려 있지 않은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목소리였다

총을 맞았습니다......”

블로어가 외쳤다.

맙소사그 권총!”

의사가 줄곧 감정 없는 목소로 말했다

머리를 관통당했어요즉사했을 겁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사람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은 멜로와 코미디뿐만 아니라 미스터리까지 다양한 장르의 혼합물이죠. 그래서 인간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추리소설이라는 장르가 필요한 게 아닌가 싶어요. 그리고 그 추리소설을 읽기에 딱 좋은 계절은 두말할 것 없이 여름이죠.   

   

  사실 애거서 크리스티는 ‘추리소설의 여왕’ 일뿐만 아니라 한때 추리소설의 주인공 같은 삶을 살기도 했습니다. 누구나 살면서 긴 터널을 통과하는 힘든 시기를 겪기도 하잖아요. 그 경험을 그녀는 ‘봄에 나는 없었다’라는 장편 소설로 완성해 냈습니다. 장르는 문학이지만 개인적으로 그 어떤 추리소설보다 더 섬뜩한 현실을 담고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그럼 끝으로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주제와도 같은 문장을 남기며 마무리하겠습니다.     




어릴 때부터 나는 무엇인가를 죽이고 싶은 강한 욕망을 갖고 있었다하지만 이런 욕망과 상충되는 특징도 있었다강한 정의감이 그것이다내가 한 행동 때문에 죄 없는 사람이나 동물이 고통을 당하거나 죽는 경우가 생기면 견딜 수가 없었다그런 일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늘 생각해 왔다.

그런 정신 상태의 소유자인 내가 직업으로 법관을 선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심리학자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법을 집행하는 직업은 그런 내 본능을 어느 정도 만족시켜 주었다.

범죄와 그에 상응하는 처벌은 언제나 나를 매혹시켰다나는 온갖 종류의 탐정 소설과 모험 소설을 즐겨 읽었다나는 은밀한 즐거움을 느끼며 탁월한 살인 방법을 고안해 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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