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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로자 Jan 25. 2022

리뷰: Boris - W

#4. 놀라운 완급 조절로 빚어낸 공감각의 판타스마고리아

  포스트 메탈이라는 화두는 지난 몇 년 사이 메탈 씬의 뜨거운 감자가 되었고, 더이상 낯설기는 커녕 좋든 싫든 피해갈 수 없는 거대한 조류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반 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축적되고 정식화된 메탈이라는 형식의 전형성을 해체하고 이탈하려는 시도는 ‘탈형식의 형식화’라는 함정을 마주하기도 했다. 예컨대 블랙 메탈 씬에서는 데프헤븐과 그들의 앨범 “Sunbather”(2013, Deathwish)가 빌보드에까지 입성하며 커다란 성공을 거둔 이후, 이전에는 프랑스의 알세스트 같은 소수의 밴드들만이 시도했던 슈게이징과 포스트 록 방법론의 수용이 하나의 유행 공식이 되어버렸다. 메탈 문법에 서정과 몽환의 색을 덧입히고 이것을 얼터너티브 음악의 방법론으로 새로이 규정해내는 일은, 메탈의 전형성을 지양하는 아방가르드이지만 한 편으로 힙스터 문화의 향유자들을 새로운 청자로 규정하고 이들에게 어필하는 페티시즘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포스트 메탈이라는 수사가 가장 잘 어울리는 일본의 익스페리멘털 밴드 보리스는, 근래의 시시콜콜한 포스트 메탈 유행과는 다른 맥락 위에 있다. 1992년 도쿄에서 결성된 이래로 서른 장에 가까운 정규 앨범을 작업한 보리스의 디스코그라피는 시류와 상관 없이 경계 너머를 전망하는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 묵직한 질감의 멜빈스 풍 슬러지 메탈 리프를, 선율과 소음, 음표와 음표 사이의 경계를 무너트리는 드론 음악의 실험법을 동원하여 형해화하고, 때로는 유영하는 공간감 속에 부유하게 하는 기상천외한 실험법. 이것은 보리스가 그들의 동료 머즈보우나 시애틀의 썬(Sunn O))))과 함께 선구자적으로 선보인 것이었다.


  물론 보리스의 앨범들 사이에서 드러나는 들쭉날쭉한 완성도에 의문을 갖는 이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스토너 질감을 기막힌 아방가르드로 풀어낸 “Pink”(2005, Diwphalanx) 같은 기념비적인 작품들도 있지만, 여러 앨범들에서 보리스는 자신들의 정동적 즉흥성에 스스로 잠식당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것은 어쩌면 한 해에도 여러 장의 앨범을 쏟아내는 그들의 다작이 빚은 역효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리스의 이번 신보 “W”에서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여기에서 이들은 여느 때보다도 높은 집중력과 놀라운 완급 조절로 무장하고 나왔으니.


  새 앨범 “W”는 2020년 발매되었던 보리스의 26번째 정규 앨범 “No”(2020, Fangs Anal Satan)와 짝을 이룬다. “No”의 마지막 트랙 ‘Interlude’는“W”의 오프닝 트랙 'I Want to Go to the Side Where Can You Touch…'의 전주다. 한편 26집 “No”와 이번 27집 “W”를 합치면 ‘now’라는 단어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신보는 하드코어 펑크의 폭압적인 속도감, 슬러지와 스토너의 사악한 질감으로 무장하고 나왔던 전작과는 반전된 분위기를 연출한다. 오프닝 트랙에서부터 펼쳐지는 끝없는 잔향의 앰비언트 사운드는, 명확한 리프로 구획되지 않고 시작과 종결을 잊어버린 듯 귓가를 지속적으로 맴돈다. 이러한 사운드적 특성은 앨범 전반을 장악하며 “W”를 보리스 본인들은 물론 슈게이징과 포스트 록 씬에서 등장했던 작품들 사이에서도 가장 완성도 높은 공간계 음향을 구축해 낸 음반들 중 하나로 만들어 준다.


  3인조 밴드인 보리스의 여러 앨범들 속에서 멤버들은 대개 보컬 파트를 두루 나누어 가졌지만, 이번 앨범에서는 특이하게도 기타리스트 와타가 보컬을 전담했다. ‘Icelina’나 ‘Beyond Good and Evil’ 같은 여러 트랙들에서 와타의 보컬은 빛을 발하는데, 마치 메이지 스타나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의 블린다 부처를 연상케 하는 읊조리는 보컬은 드림 팝의 나른한 분위기를 탁월하게 연출한다. 특히 ‘Beyond Good and Evil’에서 포스트 록의 방법론처럼 앰비언트 기타 사운드를 차곡차곡 쌓다가 마침내 터트리는 순간, 혹은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의 “Loveless”(1991, Creation)를 연상시키는 ‘You Will Know (Ohayo Version)’의 기타 사운드가 무한히 길게 늘어지는 순간, 이 위에 교차하며 등장하는 와타의 보컬은 놀라운 황홀감을 선사한다.

 

  노이즈와 드론 사운드에 대한 집념으로 어느덧 거장의 반열에 오른 보리스지만, 이번 앨범은 그런 그들의 디스코그라피 중에서도 특별한 것 같다. 발광하는 소음과 일렁이는 역동으로 가득찬 보리스의 음악들 사이에서, 빛을 향해 경이롭게 나아가는 “W”는 분명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것이다.


“W”, Boris
2022년 1월 21일 발매
정규 앨범
장르: 얼터너티브 록, 익스페리멘털, 슈게이즈, 드림 팝, 포스트 록, 포스트 메탈
레이블: Sacred Bones
평점: 8.4/10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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