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샘플델리아 힙합 황금기로의, ‘백 투 더 퓨처’
“네가 가장 좋아하는 래퍼가 가장 좋아하는 래퍼(Your favorite rapper’s favorite rapper)”, MF 둠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마치 한 시대의 종언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매드립과 함께 만들어 낸 “Madvillainy”(2004, Stones Throw), 그리고 “MM… FOOD”(2004, Rhymesayers) 같은 앨범들에서 그가 선보인 기상천외하고 경이로운 사운드, 요컨대 샘플러와 턴테이블 그리고 테이프로 기워내고 콜라주 한 텍스처 위에 얹어진 기묘한 라임은, 붐뱁이라는 문법이 갖는 상상력의 경계를 저 멀리 전위적인 지점까지 전진시켜 두었다. 오드 퓨처의 멤버들(타일러, 더 크리에이터와 얼 스웻셔츠 등)과 대니 브라운 같은 2010년대 가장 창의적인 MC들의 시발점도 어쩌면 바로 여기에, 그리고 제이 딜라와 DJ 섀도에 이르는 천재적인 ‘힙합 상황주의자’들의 디스코그라피에 있다.
그러나 옛 뉴욕을 주름 잡은 고전적인 샘플링 사운드의 안티테제로 통통 튀는 신시사이저의 그루브함에 힘을 준 G-훵크가 등장해 캘리포니아를 휩쓸었던 것처럼, 턴테이블리즘에 기반한 콜라주적 얼터너티브 힙합 사운드들 역시도 급진적일지언정 모든 힙합 향유자들이 불문율처럼 소비해야만 하는 강령적인 것이 될 수는 없었다. 2000년대에는 남부에서부터 몰아치기 시작한 크렁크 씬의 어마 무시한 클럽 바이브, 이후에는 질주감 넘치는 트랩의 컴프레싱 된 채 몰아치는 디스토션 타악기 텍스처가 메인스트림에서 위력을 떨쳤다. 무엇보다 이들에게는 형해화된 채 늘어지며 흘러가는 턴테이블리즘적 사운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훅(hook)의 흥분이 있었다.
샘플링 작법이 활용되기 시작한 것도 벌써 수십 년, 언젠가부터는 형식화되어 뻔히 자리잡게 된 샘플델리아 사운드에 새로움을 기대하기도 어려운 일이 되었다. 내게 MF 둠의 죽음은 그래서 “한 세대의 퇴장”처럼 무겁게 다가왔다. 이제 20년 전 쯤 진보적이었던 힙합 마스터피스들, 가령 DJ 섀도의 “Endtroducing…”(1996, Mo’ Wax)이나 제이 딜라의 “Donuts”(2006, Stones Throw)는 이제 아방가르드의 영역이 아니라 노스탤지어의 영역에 머무른다. 둠과 제이 딜라의 전진을 사람들은 이제 ‘올드-스쿨’이라고 부른다. 요즈음 완성도 높고 환각적인 붐뱁 사운드로 주목 받는 그리셀다 레코즈의 멤버들, 예컨대 웨스트사이드 건이나 마크 하미가 평단들의 호평을 받는 것도, 그들이 무언가 새로운 음악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과거와 동시대가 만나는 지점에서 이 시대 힙합이 갖는 노스탤지어에 매력적으로 호소하기 때문이다.
멤피스 출신으로 하드코어 펑크에서 앰비언트에 이르는 다양한 장르음악에 손을 댔던 언더그라운드 래퍼 시티스 어바이브의 신보 “Man Plays the Horn”도 얼핏 보면 비슷한 과거-회귀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 같다. 아니, 이 앨범은 ‘코카인 랩’이라는 특유의 몽환적 사운드 메이킹을 강조하는 그리셀다보다도 더욱 전형적으로 옛 샘플델리아를 소환해내는 것 같다. 하지만 이걸 단순히 옛 힙합 리스너들에게 호소하기 위해 만들어진 흔한 앨범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곤란하다. 시티스 어바이브는 여기에서 과거로의 회귀를 너무나 천재적으로 해내어, 역설적이게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시간을 앞서가는 아방가르드처럼 보이게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시티즈 어바이브는 요컨대 아프리카계 미국인 장르음악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교차해낸다. 오프닝 트랙 ‘Everythang Workin on a Natural Time’의 문을 여는, 앨범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듯 의미심장한 샘플링을 들여다보자.
“I, I would say even more, uh, shockingly, African-American music is somehow allowing its distance to slip away from them. I mean, yeah, it used to be when I was a kid, everybody in the neighborhood was somehow into this music. They all knew who Miles was, they all knew something about Charlie Parker or J.J. Johnson, well today, we're into another era, young people are rapping...hip-hop. I've got nothing against that, it's just that there's a reason for that, partly, it's economic. When I was a kid you could buy a saxophone for $500 and today it costs a person $5000 to buy a saxophone, so quitе naturally, young kids, the young culture of today are, arе rapping, instead of blowing their horns or playing pianos or, or, or, into some other instrument, because the possibility of acquiring those instruments, acquiring music lessons, has become much more remote.”
“저는, 음, 더 말하자면… 충격적이게도, 아프리카계 미국인 음악은 어쩌다 보니 그것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멀어지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그래요. 내가 어릴 적에는 동네의 모두가 이런 음악들을 듣고 있었지요. 그들 모두가 마일스 데이비스가 누군지 알고 있었고, 찰리 파커나 J.J. 존슨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거에요. 그런데 요즈음에는, 우리는 다른 시대에 살고 있고… 젊은이들은 랩, 힙합을 하고 있어요. 나는 여기에 유감이 없어요. 다만, 이렇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지요. 경제적인 이유 말입니다. 내 어린 시절에는 색소폰을 500 달러면 살 수 있었는데 요새는 5,000 달러나 있어야 해요. 그러니까 정말 당연하게도, 젊은이들 그리고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향유하는 문화는 랩이 된 겁니다. 관악기를 불거나, 피아노를 치거나, 음 아니면 뭐가 되었든 다른 악기를 연주하는 대신에 랩을 하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이 악기들을 장만하고, 전문적인 레슨을 받는 게 옛날보다 훨씬, 훨씬 힘드니까.”
서구 대중음악의 오랜 역사는 구별짓기의 역사였다. ‘순수 예술’에 후원하는 봉건 귀족 따위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미국 사회에서 모두는 손쉽게 시장의 일원이자 소비적 주체가 될 수 있는 듯 보였고, 음악예술의 이해를 위한 어떤 지적 토대도 필요 없는 ‘이지 리스닝’이라는 환상이자 허위의식은 모두를 청중이자 소비자로 호명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대중음악산업의 자본과 문화적 헤게모니를 예로부터 쥐고 있던 백인들이 만들거나, 아니면 백인들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음악을 훔쳐와 대신 연주하거나(백인 연주자들의 재즈), 아니면 자기들의 음악에 섞어버리고는 흑인들을 내쫓는(로큰롤) 음악이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교회 공동체와 노동자 공동체로부터 발원한 스피리추얼과 블루스, 그리고 그것의 후예로서 흘러온 아프리카계 미국인 장르음악 영역들은 철저한 게토로서 구획되었고, 자본이 인종을 이미지화 하여 설정한 그 매서운 경계를 쉽사리 넘을 수 없었다. 스타디움 투어를 도는 록 스타들이 비싼 악기들로 록 음악을 연주하는 동안 이 게토에는 그만한 대중음악산업의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제 이 게토 속 음악을 연주할 악기를 살 돈조차 없어진 이들은, MC가 되어 마이크를 잡고 주류를 약탈하기 시작한다.
저 비장한 샘플링으로 시작하는 “Man Plays the Horn”은 샘플델리아 힙합의 『공산주의자 선언(The Communist Manifesto)』이 되고자 한다. 기타가 되었던 드럼 세트가 되었던 건반이 되었던, 부르주아 백인 창작자들이 연주하는 어쿠스틱 혹은 전기 악기들의 텍스처들을 게토에서 약탈하고 분자 단위로 쪼갠 뒤 다시 조립해 재전유하는 샘플링의 이데올로기를 강령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시티스 어바이브는 호른을 직접 연주하지 않지만 호른의 텍스처를 훔쳐와 자신의 비트로 빚어내고, 그렇게 기꺼이 ‘호른을 연주하는 이’가 된다. 옛 백인 음악들을 약탈하고 재전유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상황주의적 장르음악들이 결국 제도화의 변증법을 이겨내고 로큰롤의 왕좌를 뺏어 온 것을 보면 벅차 오르는 마음이 든다.
‘Everythang Workin on a Natural Time’의 육성 샘플링 이후 이어지는, 샘플 루프로 된 리프의 힘도 어마어마하다. 올해 지금까지 들었던 힙합 트랙 중에서는, 얼 스웻셔츠의 ‘2010’과 함께 가장 기억에 남는 강렬한 멜로디 라인이다. 시티스 어바이브는 이윽고 랩을 시작한다. 사실 그의 랩이 트랙들 사이를 다채롭게 종횡하며 날뛴다고 볼 수는 없는데, 시티스 어바이브의 랩 톤은 데스 그립스의 MC 라이드와 유사한, 너무 무겁지는 않되 적당히 투박하며 둔탁한 두께를 일관되게 이어가고자 한다. 그런데 장르가 장르이니만큼 그에 비해 훨씬 편안하게 흘러 간다.
우리가 예상할 수 있고 또 좋아할 수 있는 사운드 디자인이 이후를 색칠해 간다. 베이퍼웨이브를 연상케 하는 로-파이적 감각과 나른한 원근감의 바이브가 완행 열차처럼 시종일관 천천히 흘러간다. 이건 반갑지만 지루하고 심지어 믹싱도 귀에 피로한 방식으로 되어서, 길쭉한 앨범의 러닝타임을 좀 쳐내도 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중간중간 놀랍게 번뜩이는 순간들도 찾아온다. 박자를 쪼개 추상화하는 턴테이블리즘 특유의 방식이 ‘Cinema Club’에서 두드러지게 튀어나오다, ‘Burning Light in Eyesight’에서는 아예 턴테이블로 IDM을 하는 듯한 기발한 사운드가 등장한다. ‘Black Preasure’의 예시처럼 곳곳에서 드러나는 관악기의 프리 재즈적 불협화음도 적절히 배치되어 전형성을 무너트린다. 한편 ‘Smoking on a Brighter Day’에서는 촉촉한 잔향의 리버브를 잔뜩 묻힌 기타를 동원해 쌓아간 환각적이고 몽환적인 사이키델리아가 펼쳐진다. 시티스 어바이브의 앰비언트 감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Romance’에서는 놀랍게도 글리치 사운드가 동원되고, 앨범 말미의 두 트랙 ‘Time & Time’과 ‘The Final Spark’는 재즈 랩 텍스처를 가지고 완전히 새로 칠해낸 본격적인 앰비언트 곡이다.
제이 딜라와 MF 둠, 얼 스웻셔츠와 JPEG마피아의 인상이 “Man Plays the Horn”을 스쳐 지나간다. 노이! 같은 독일 크라우트록과 IDM의 정취들도 이와 교차한다. 앨범의 사운드는 얼핏 들으면 구닥다리 같지만 집중해서 들을 때 놀라운 다채로움을 선사한다. 이 앨범을 통해 기억과 전망이 만나는 매력적인 경험을 해보시라.
“Man Plays the Horn”, Cities Aviv
2022년 2월 4일 발매 (2022년 2월 22일 Director’s Cut 발매)
정규 앨범
장르: 얼터너티브 힙합, 익스페리멘털 힙합, 앱스트랙트 힙합, 컨셔스 힙합, 드럼리스, 재즈 랩, 클라우드 랩
레이블: Total Works
평점: 7.7/10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