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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로자 Mar 24. 2022

리뷰: Charli XCX – CRASH

#17. 메인스트림 문법으로 박살낸 찰리 XCX의 정체성

  마이스페이스 세대로 그 시절부터 작업물을 웹 공간에 공유하던 영국 출신의 싱어송라이터 찰리 XCX는, 점차 확대되는 소셜 미디어 공간의 수혜를 입고 ‘엔젤스’라 불리는 팬덤을 등에 업은 채 정규 3집 “Charli”(2019, Asylum / Atlantic)와 팬데믹 시대 자가격리로 인한 고립 속에서 자기 진술을 펼치는 4집 “how I’m feeling now”(2020, Asylum / Atlantic)을 내놓으며 ‘하이퍼 팝’이라는 장르적 수사에 가장 멋지게 부합하는 셀레브리티로 성장했다. 특히나 그의 믹스테잎 “Pop 2”(2017, Asylum)는 2010년대 팝 시장을 상대로 아웃사이더 기질의 팝 뮤지션이 선보인 가장 도발적이고 매력적인 결투 신청이었다. 이 릴리즈들은 공통적으로, 드럼 앤 베이스에서 글리치에 이르는 여러 일렉트로니카 하위 장르들의 요소들을 들이마시고 비틀며 자기만의 사운드적 특징을 빚어 갔다. 역동적으로 뒤틀리는 전자 음악 텍스처 속에서, 찰리 XCX는 카녜 웨스트에서 뷰욕 그리고 아르카의 “KiCk” 연작들을 연상케 하는 다양한 아방가르드적 인상들을 댄서블한 감각의 팝 페티시즘으로 뒤섞어 풀어내고는 했다.  


  그랬던 찰리 XCX가, 이번에는 메이저 레이블 애틀랜틱을 통해 내놓는 마지막 정규 앨범 “CRASH”를 들고 돌아왔다. 2016년에 내놓았던 EP “Vroom Vroom”(2016, Vroom Vroom / Asylum)에서 트랙을 질주할 준비를 마친 섹시한 슈퍼 카를 커버에 등장시켰던 찰리 XCX. 이번 신보, “충돌”이라는 제목의 새 앨범 커버 속에서 찰리는 교통사고 현장을 연출하며 깨진 차창 사이로 피를 뚝뚝 흘린 채 우리를 응시하고 있다. 커리어 내내 가속 페달을 밟으며 패셔너블하게 달려오던 찰리가 무언가 커다란 장애물에 부딪힌 걸까. 상처를 유감 없이 드러내는 아티스트의 초상은, 위켄드가 지난 4집 “After Hours”(2020, XO / Republic)의 앨범 커버에서 잔뜩 얻어 맞아 피칠갑을 한 얼굴을 쳐들고 웃어 보이던 순간을 떠오르게 한다. “After Hours”의 피 흘리는 위켄드는 요컨대 연약하고 신경증적인 자아 자체와 내적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앨범의 뚜껑을 열어 보면, “부릉 부릉” 소리를 내며 질주하던 찰리 XCX가 마주쳐버린 건 조금 다른 층위의 문제 같다. 아마 교통사고를 일으킨 상대 차주의 이름은 ‘메인스트림’이 아닐까. 제대로 크게 다친 찰리 XCX는 새 앨범에서 기를 못 쓰고 있다. 곡의 정합적인 구조를 무너트리며 예상을 이탈하는 구성도, 청자를 흥분으로 몰아 붙이며 마구 쏘아대는, 게인을 잔뜩 먹은 과격하고 폭력적인 전자음 텍스처의 폭풍도 새 앨범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대신 러닝타임을 채우는 것은 2022년에 맞게 재구성 된 뉴 웨이브 시대(혹은 ‘뉴 키즈 온 더 블록’ 시대)의 댄스 팝 사운드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CRASH”는 두아 리파의 “Future Nostalgia”(2020, Warner)를 찰리 XCX의 명의로 내놓기 위해 슬쩍 변주하고 다시 프로듀싱한 작업물 같다. 대중음악시장의 외부자적 위치에서 팝 아티스트들을 ‘견인’하는 음악을 만들던 찰리 XCX가, 이제는 레트로한 댄스 팝 유행에 뒤늦게 올라타는, 시류를 뒤따라가는 앨범을 만들어버린 셈이다. 


  첫 트랙 ‘Crash’를 거쳐, 싱글이기도 한 두 번째 트랙 ‘New Shapes’에 이르면 이러한 인상은 정말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Future Nostalgia”의 수록곡이나 두아 리파의 킬러 싱글 ‘New Rules’를 톰슨 트윈스 풍으로 뒤엎은 듯한 스타일의 인스트루멘틀 위에서, 찰리는 두아 리파 모창과 레이디 가가 모창 사이에 선 보컬리스트처럼 노래를 한다. 유리스믹스의 신디사이저 리프를 스포티파이 차트 수록곡 사이에 끼워놓은 듯한 ‘Good Ones’가 흘러가면, 하이퍼 팝 팬들이 사랑하는 앰비언트 텍스처의 징후만이 옅게 남은 ‘Constant Repeat’, 그리고 피처링으로 무려 리나 사와야마를 데려와 놓고서는 두 천재 아티스트의 여러 개성들 중 무엇 하나도 키치적으로 살려내지 못하는 ‘Beg for You’가 등장하며 실망감을 안긴다. 이만큼 했으면 후반부의 여러 트랙에 관한 묘사를 더하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을 것 같다. 뻔한 동어반복이 될 것임이 틀림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CRASH”는 찰리 XCX에게 뒤늦게 찾아온 소포모어 징크스다. 찰리 XCX가 “CRASH”의 발매를 앞두고 애플 뮤직과 진행한 인터뷰에서도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난 것은, 메인스트림 팝 스타라는 지위 사이에서 표류하는 스스로의 불안한 위치였다. 자신의 이름이 바이럴이 되고 메이저 레이블과 계약하게 되는 커리어의 흐름은 어쩌면 예술가에게 창작이 아닌 시장에서의 인정 투쟁을 요구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환원될 수 있다. 이러한 외적인 압박 속에 내놓은 찰리의 신보 “CRASH”는 분명 나쁘거나 거슬리는 앨범은 아니다. 다만 ‘팝적이지 못한’ 너무 많은 것을 쳐내 매끈하게 다듬기만 한, 그래서 자라 매장의 배경음악 따위로 주구장창 틀어 놓을 수는 있지만 커다란 인상과 기억을 남기지는 못하게 된 한 장의 팝 ‘셀-아웃(sell-out)’으로 전락해버렸을 뿐이다. 


  그나마 희망적인 것은, 찰리 XCX가 이번 앨범을 마지막으로 메이저 레이블 애틀랜틱과의 계약을 마무리한다는 점이다. 본인 말마따나 “대기업의 지원을 받아 찰리 XCX 표 팝 음악에 메인스트림의 화려함을 입히려던” 기획이 쉽사리 잊힐 만한 실패로 판명 난 상황에서, 창작자의 외부에서 창작을 제약하는 압력 없이 찰리 XCX 고유의 개성으로 승부할 수 있는 환경이 다시금 펼쳐진다면 좋겠다. 찰리 XCX는 여전히 재능 있고 유망한 뮤지션이고, 그가 “Pop 2” 같은 작업을 다시 한 번 더 못 내놓으리라는 법도 없으니까.



“CRASH”, Charli XCX


2022년 3월 18일 발매
정규 앨범
장르: 댄스 팝, 신스 팝
레이블: Asylum, Atlantic, Warner UK
평점: 5.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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