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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소금 Nov 17. 2021

전업 부부 전업 부모

전업 엄마, 전업 아빠! 홈스쿨 가족입니다.

  제주의 바람이 차가워졌지만 그렇다고 마냥 집에서 따듯한 날이 오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세 아이를 외투, 모자로 무장시켜 동네 놀이터로 나갔다. 여름 내내 하루도 쉴 틈 없이 밖으로 돌다가 너무 오랜만에 나와서일까? 8살 첫째가 약간은 소심하게

 “엄마, 나 저기 올라가고 싶은데 올라가도 될까?” 하면서 흙과 돌, 낙엽이 수북이 깔린 가파른 언덕을 가리켰다.



- 당연하지! 너 어린이야 어른이야?

- 어린이!

- 어린이의 할 일이 뭔지 알아? 노는거야.

   너 어린이지? 너의 할 일은 노는거야!

   열심히 놀아. 하고 싶은 거 다해.

- 응 알았어! 근데 왜? 어른이 되면, 못 놀아?

- 아, 음... 어른이 되면 할 일도 좀 많아지고..       

   뭐 그렇잖아.

- 왜? 막 놀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

   (딸은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듯 놀라서 물었다.)


- 아... 응. 그렇기도 하고 너처럼 신나게

  놀 줄을 몰라. 창의성이 점점 없어지거든..

  아무튼! 좀 그래.



  순간 딸은 어른이 된 나를 ‘오 엄마, 어른이어서 너무 안됐다’하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리고는 낙엽이 바스락바스락 거리는 언덕 위로 올라간다. 딸의 뒷모습, 세 아이들의 조심스럽고도 거침없는 움직임을 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놀고싶지 않기는... 사실 나도 놀고싶다! 하루 종일 뒹굴거리다가 시계를 보지 않으면서 생각없이 마음껏 책 읽고 실컷 늦잠도 자고 싶어. 주방 폐업하고 아빠랑 둘이서만 근사한 레스토랑에 가고 여행도 하고 드라이브하고 싶다.



  그렇지만 놀이터에 와서는 더이상 놀고 싶은 마음이 들지않는 어른의 놀이, 더이상 저 언덕 위로 올라가 보고싶은 마음이 들지않는 어른들의 할 일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봤다. ‘어린이들을 놀게 해주는 것..!’ 그래, 어른의 가장 중요한 할 일은 어린이들이 실컷 놀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공부는 최대한 덜 하고, 최대한 많이 놀면서 키운다. 이게 맞는 건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애들을 많이 놀게 하는 게 내 목표고 방향이다. 이렇게 키우면 창의성과 감수성이 더 풍부해지고 적기에 공부할 공부 그릇이 더 넓어지니까 -하는 그런 원대한 의식이 있어서가 아니라, 나중에 아이들이 다 크고 나면 이 시절을 추억하면서 후회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내 품을 떠날 때쯤, 남편과 내가 그때 가서 뭘 후회하게 될까를 자주 상상했다. “아 그때! 4살, 8살 때 말이야 공부를 좀 더 많이, 힘들게 시켰어야 됐는데.” 이런 후회를 할까?

“그때 아이들이랑 더 많은 시간을 보낼걸, 가족이 좀 더 함께 지낼걸, 더 많이 다니면서 계절을 누려볼걸, 눈 맞추고 한번 더 놀아 줄걸.” 내가 할 것으로 예상되는 후회는 전자보다 후자였다.




  딸은 교실로 올라가는 계단이 슬퍼서 자꾸만 눈물이 난다고 했다. 그래도 선생님 앞에서는 울면 안 되니까 눈물은 닦고 세수도 하고 교실문을 연다 고백한 딸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그 말을 들은 뒤부터 아이를 맞이하는 학교의 첫 얼굴인 높은 교문이 꼭 감옥의 철장 같았다. 아이의 표정은 굳어갔고 얼굴은 점점 생기를 잃었다.


“저희 아이가 좀 느려서요”

“아니요 어머니. 아이가 굉장히 똑똑하고 제 말도 빠릿빠릿 알아듣고 수업도 잘 따라오던데요?”

“아, 네.. 그런 게 아니라...”

 

  나는 아이가 세심하고 관계를 정말 중요시하는 아이라 교실의 분위기, 담임 선생님의 표정 그곳의 온도와 색감 하나하나를 다 느끼고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걸 느리다고 표현했다. 40명 가까이 되는 아이들을 통솔해 가야 하는 선생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밤마다 악몽을 꾸고 소리를 지르며 깨는 우리 아이의 마음도 좀 돌보아 달라고 부탁할 수는 없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구조이고 시스템일 뿐이었다. 선생님이 무섭다고 하는 아이와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그날 처음 들었다. 내가 먼저 물어봐서. 아이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끝내 모르고 지나갔을 이야기. 새학기, 아이의 첫 담임과  할 수 있는 대화는 그게 다였다.


  선생님과 주변에서는 처음은 다 그렇다고. 누구나 적응은 어렵고 힘든 일이니 다 겪는 일이 아니겠냐고, 아이도 견딜걸 견뎌야 한다 말했지만 나는 아닌 걸 알았다. 나는 엄마니까, 알았다. 내 아이가 부족하고 어딘가 좀 문제 있어서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불행하고 불안한 아이와 그것에는 전혀 관심도 없고 상관도 없는 어른이 있는 교실. 억지로 학교에 밀어넣고 “견뎌야 할 것을 견뎌내”라 하고 싶지 않았다. 60대로 보이는 교감 선생님은 나와 아이를 쳐다보며 말했다.

홈스쿨이요?
사회성이 부족해지지 않겠어요?
아니, 그래도 애가 학교를 다녀야죠.

  홈스쿨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이 꼭 빼놓지 않고 하는 이야기가 ‘사회성 부족’이다. 조지 워싱턴, 아브라함 링컨,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비롯한 역대 미국 대통령과 안데르센, 마크 트웨인, 찰스 디킨스를 비롯한 유명 작가들, 볼프강 모차르트, 토마스 에디슨, 아인슈타인, 슈바이처, 퀴리 부인, 나이팅 게일, 더글라스 맥아더 등 아직도 우리 생활에 영향을 주고 이름만으로도 설레는 이 모든 인사들이 홈스쿨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을 교감 선생님은 알고 있었을까?

‘그래도 애가 학교에 꼭 다녀야 하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무리 힘들어도, 무슨일이 있어도 가야만 하는 학교에서 교육을 통해 진정으로 배우는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하고 싶었다. 계속 학교에 보내면 우리 아이한테 대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가슴속에 묻었다.



  홈스쿨을 결정하던 날 딸이 그랬다. “엄마, 나 학교 안 가도 바보 안되게... 내가 열심히 할게” 충격이었다. 내 상식안에서 만7세 아이는 그런 생각은 하지 않고 살아도 되는거였다. 내가 주입하지 않아도 아이는 이 세상을 살면서, 그 짧은 시간 안에 자연스레 이미 그런 가치를 습득한거였다. 학교에 가지 않아도 바보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아이에게 꼭 알려주고 싶어서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모두가 가지는 않는 길로 아이와 함께 가보기로 했다.

“잘못 알고 있구나! 너무 공부만해서 바보가 되는 거야. 공부 말고도 인생엔 배워야 할게 많아. 바보가 될까 봐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어.”



  한바탕 태풍이 지나가고 나면 평온해지고 고요해지듯이 학교를 나온 아이는 가정 안에서 금세 평온한 일상을 찾았다. 벌써 몇년 째 나와 같이 다둥이 전업육아를 하며 남편은 저녁마다 온몸이 바스라질 것 같은 피로를 느끼고 나 역시도 매일매일 이른 육아 퇴근이 간절하지만, 그냥 이렇게 산다. 몰입해서 육아하고 365일 24시간 애들이랑 꼭 붙어서 놀고 있다.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건지 솔직히 가끔은 정말 모르겠다. 헷갈릴 때도 있고 나도 나가서 남들처럼 일을 하고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좀 더 벌어야 하지 않나, 내 인생 조금 아까운 거 아닌가 그렇게 흔들릴 때도 있다. 그때마다 나를 붙잡아 놓는 건 아이들의 얼굴과 그 표정이었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 8세, 4세, 21개월 우리 집 작은 사람들이 행복해 보인다. 애들 말을 듣고 있으면 가족을 사랑하고 아마도 ‘행복감’을 느끼며 크고 있는 것 같다.





  아이들이 행복하다는 핀란드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아빠들이 회사에서 평균 4~6개월 정도 유급휴가를 받는다고 한다. 일하지 않고도 돈을 받는 육아를 위한 휴가를 받는 것이 일반적인, 보통일 이라고 했다. 당연히 아빠들의 육아 참여도가 높고 엄마의 모유수유 기간이 길어진다. ‘이래서 핀란드가 교육 선진국가가 되었구나, 사람들이 왜 이민을 가고 싶어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아.’ 생각해 본 적도 있다.



  왜 우리는 아기가 울지 않는 나라가 되었는데도 제도는 마련되지 않을까, 어쩌면 정책을 만드는 사람들은 한 아이가 탄생하든 말든 개인의 가정사에는 관심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그게 곧 국가의 일인지도 모르고. 임신하면 보건소에서 엽산 몇 개 철분 몇 개(필요한 다른 영양제가 얼마나 많은데!) 챙겨주는 이런 나라에서 내가 애를 셋이나 낳았다니, 가끔 억울할 때면 밤낮으로 아이들의 눈이 나를 보며 말해주는 것 같다.


‘엄마 인생은 아깝지도 억울하지도 않아요. 우리가 이렇게 잘 자라고 있잖아요.’

하면서 때로는 불안하고 위태로운 전업부모의 마음을 쓰다듬어 준다.


  아이들이 보내는 눈빛과 응원 미소를 받으며  나라에서  해주면 우리 가정이라도 그런 여건을 만들어서 ‘애들 키우용감하게 한번 살아보자하고 생각을 바꿨다. 아이들 이야기를 하면  글은 길어진다. 호기롭게 쓰고 있지만, 사실 언제까지 홈스쿨을 지속하고 남편과 함께 집에서 전업 부모로 살아갈  있을지는 장담할  없는 일이다. 그래도  가지는 확실하다. 앞으로  년을  산다고 해도 지금까지 내가 아이들에게 받은 사랑보다   축복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거라는 . 이보다  사랑으로 충만할 수는 없을거다. 차려준 아침저녁을 먹는 아이들을 바라보면 행복하고 따끈하게 데운 목욕물로 함께 목욕하고 나와서  작은 손으로   구석구석 로션을 발라주면  우주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기분이 드는, 별것 아닌게  벅차오르고 행복한 전업 부모로 산다.



“그 누구도 아닌 자기 걸음을 걸어라. 나는 독특하다는 것을 믿어라. 누구나 몰려가는 줄에 설 필요는 없다. 자신만의 걸음으로 자기 길을 가거라. 바보 같은 사람들이 무어라 비웃든 간에...”
-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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