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르지 않고 단단하기만 했던 나의 경도
연이어 이틀 저녁을 경도의 집에서 먹었다. 그녀는 늦은 오후에서야 집에 돌아와 계절을 담은 저녁을 차려 낸다. 어깨를 나란히 한 냉장고 세 대는 각자의 품에 바다와 산, 들과 밭을 모두 그러담고 있다. 저녁 식탁엔 언제나 정성과 신속함의 균형이 함께 한다. 그녀의 공간과 시간에는 여백이 없다. 하나에서 다음으로 연결되는 일련의 흐름이 매끄럽다.
경도는 일일 드라마를 소파에 앉아 보지 않는다. 소파에 등을 기댄 채 무언가를 한가득 펼쳐놓는다. 그녀에게 티브이는 노동과 노동요 어느 중간 지점에 있다. 티브이와 그녀 단둘의 시간은 없는 편이다. 대체로 그것은 손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고 어깨와 목, 그리고 허리의 수고로움을 동반한다.
어제는 파란 다라이에 알타리가 소복이 담겨있더니 오늘은 가늘고 기다란 우엉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다라이답게 늘 무언가를 한가득 담아내고 비워내길 멈추지 않는다. 이웃에 사는 춘화에게 연근을 좀 사다 놓으라 했더니 그것이 우엉이 되어 나타났다. 봉지를 벗기고 부어내니 싱크대가 짙은 갈색이 된다. 저녁을 실컷 먹은 탓에 그녀를 도와 우엉을 다듬기로 한다. 흙을 씻어내고 껍질을 벗겨주면 그녀는 우엉에 가장 어울리는 모양을 찾아 가늘게 채를 썬다.
수를 셀 엄두조차 나지 않는 우엉 더미들을 헤쳐가며 한참 껍질을 벗긴다. 열 손가락 어느 것 하나 뺄 것 없이 모든 손가락 끝과 손톱 밑이 까매진다. 경도의 손톱은 어떤지 슬며시 살펴본다. 조금 자라난 손톱 밑은 거뭇거뭇함이 어려있다. 손톱에서 시작한 눈의 탐험은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살핀다. 손가락을 덮고 있는 피부는 군더더기 없이 매끈하다. 최소한의 근육과 그것을 덮고 있는 피부가 다인 것 같다. 마디와 마디 사이도 힘껏 당겨놓은 듯 팽팽하다. 모든 마디들은 수축과 팽창을 거듭하며 짙은 조각들이 된다. 목에는 주름이 격자무늬로 펼쳐져 있다. 부리가 큰 새의 목주름처럼 흔들리는 물결이 보인다.
눈에 보이는 것들에서 눈여겨보지 않으면 놓치기 쉬운 것들에도 주의를 기울인다. 이를테면 경도의 입안. 자의든 타의든 그녀의 입을 활짝 벌려 위아래, 좌우를 살펴봐야 하는 치아 같은 것들 말이다. 지금에야 입을 활짝 벌려 보여주지만, 치과 치료를 받기 전에는 아무리 졸라도 굳게 다문 입을 결코 여는 법이 없었다. 셋째 딸을 결혼시키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아랫니 세 개가 연이어 뭉텅뭉텅 빠져버렸다. 어느 저녁 손바닥에 내려앉은 뼛조각 같은 이들을 보며 나이 든 경도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얼마나 오랜 시간을 이를 악물고 버텨온 걸까? 이와 함께 무엇이 빠져나갔을까?
나의 경도는 광물의 단단함을 닮아있다. 그녀의 일상은 지구의 양쪽 끝을 오가는 광활한 선의 여정을 떠올리게 한다. 단단한 경도, 지구를 가르며 낙하와 상승을 거듭하는 경도.
경도가 말랑말랑했을 순간을 상상해본다. 보드랍고 엉뚱하고 어쩌면 수줍었을지도 모르는 어린아이, 열다섯의, 스물하나의 낯선 얼굴, 스스로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한 달이 가득 차고 넘쳤을 그 시간을 겨우 가늠해보는 것이다. 달리기를 잘하던 단단한 종아리와 정강이를 가진 사람, 환한 광대를 가진 얼굴을 마주한다.
다음엔 경도의 친구로 태어나야지. 엇비슷한 나이로, 닮은 계절과 시절을 살아봐야지. 단단하거나 무르거나 그녀의 모든 순간을 나란히 서서 같이 살아내야지. 어쩌면 지구를 가로지르는 돌멩이라든지, 번쩍하는 빛줄기가 되어 한 번은 더 만나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