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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센티아 Nov 01. 2021

스스로를 인정한다는 것

자기 자비가 말처럼 쉽더이까?

벌써 10월도 다 끝나간다. 이번 주말 핼러윈 데이를 끝으로 2021년은 달랑 두 달 남게 되었다.


올해만큼 게으르게 밍기작거리며 갈피를 잡지 못했던 한 해도 없는 듯하다. 언제나 내게는 확고한 방향성과 촘촘한 플랜이라는 게 있었던 듯한데. 올 초부터 나는 그것들이 뿌리부터 흔들거리는 것만 같았다. 대체 어디부터 삐걱거리게 된 것일까? 그 근원을 밝혀낼 수 없다면 아마도 이대로 나는 내년을 맞을지 모른다.


그래서 반드시 알아내야만 한다!


© eehnoey, 출처 Unsplash



어쩌면 이대로 갈대처럼 살랑살랑 흔들리며 사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 않을지 모른다. 타이트하게 스스로를 옭아메며 산다 한들 세상 그 누가 알아주랴는 생각이 들 때면 더더욱 느슨하게 살아버리고 싶다는 유혹에 사로잡히곤 한다. 딱히 누구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결과적으로는 엄청난 차이가 날 것도 아니라면 속 편하게 여유롭게 살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헌데 세상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스스로가 그런 방식의 삶은 영 내키지가 않는다는 게 결정적 문제다. 내 세대는 경쟁과 배금주의로 얼룩진 겉치레와 허세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끼인 존재들이다. 진정한 내면의 자유와 자존감을 소유하지 못한 채 밖으로부터 인정과 존재감을 얻어야만 삶의 의미를 맛볼 수 있는 영혼들인 것이다. 그래서 still hungry 하다. 먹어도 먹어도 남이 말해줘야만 배가 부르다. "참 잘 먹는구나!"이렇게.

© stefentan, 출처 Unsplash


나는 그나마 또래에 비하자면 나름 항상 독자적 인생 노선을 추구해 왔다고 자부해왔다. 남들의 인정에 목숨 걸듯 쩔쩔매는 사람과도 한참 거리가 먼 줄 알았다. 고독을 즐길 줄 알며 혼자서도 당당하게 내 인생의 노를 저어갈 힘이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돌아보니, 남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고독을 즐길 수 있었던 건 끊임없이 시간과 에너지를 쏟으며 사교의 한가운데를 휘젓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독자적이라거나 개성 있다고 믿었던 내 삶의 방식은 역시나 내 세대 부류들 중 발견되는 일종의 장르였을 뿐 나만의 창작품이 아니었다. 그랬으니 함께 어울리며 그 방식을 서로 옹호하고 지켜갈 동료들이 지천에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 timmossholder, 출처 Unsplash


이제 막상 남으로부터 아무런 인정도 평가도 받을 필요가 없어지니 진정 묻게 된다.


내 삶의 목표란 대체 뭐란 말일까?

내 스스로가 나를 인정하는 것?

하! 말도 안 되는 소리.


자기 자비란 마흔이 돼서야 겨우겨우 알게 된 신개념일진대, 어떻게 내게 바로 뉴노멀로 자리를 잡을 수 있단 말인가. 몸과 마음을 들들 볶아대며 어렵사리 피땀으로 손에 쥐게 된 성취만이 내 존재의 가치와 재능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무의식 깊은 곳에서 아우성을 쳐대고 있는데. 스스로에게 도무지 너그럽지 못한 그런 나로부터의 인정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미친 소리다.

차갑고 매서운 자아 검열과 비판에 그만 찔려 죽어버리고 말 것이다.


일평생 '가면 증후군'에 시달리며 끝도 없는 사다리를 오르기만 하려는 영혼이 어떻게 진정한 내면으로부터의 평화와 만족을 얻을 수 있을까? 차라리 바깥으로부터 인정받으려 애쓰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 스스로가 인정하는 나란 영원히 있을 리가 없을 테니


© avcreations, 출처 Unsplash



하지만 언제가 되었든 간에 결국엔 내가 나를 인정하고, 내 삶과 운명을 긍정하는 그 합의에 도달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지 못한다면 더욱더 늙어만 갈 앞으로의 남은 하루하루를 어떻게 대면해낼 수 있겠는가. 부족함과 한심함, 실망감에 몸서리치는 심정으로 대체 매일 거울을 무슨 기력으로 들여다본단 말인가.


오래전 이미 나 스스로와 화해했다고 믿었지만, 실상은 아직 그렇지 못한 모양이다. 여전히 가끔씩 나는 내가 밉다. 왜 이 정도뿐인지 더 나은 삶의 풍경으로 나를 데려가지 못하는 건지 그 무능과 모자람이 밉상스러워 견딜 수가 없다. 그럴수록 더 괴로워질 뿐임을 머리로는 알아도 그냥 그런 감정이 느껴진단 말이다.


물론 그 덕분에 이 정도라도 살고 있다는 깨달음에 이내 마음을 다잡는다. 한국의 현대사와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우리의 조급함과 근성, 향상심과 시기심이 결국 오늘날 우리나라를 여기까지 이끌어 왔듯이 말이다. 나는 그야말로 한국 사람인데, 응당 그 기질 개를 줄까.


다만 언제까지 위기 팔이를 하며 현실을 고뇌 속에 담금질할 것이냔 말이다. 내가 서서히 그 쇠사슬에서 풀려나는 날에 어쩌면 내가 사는 이곳도 조금 더 쾌적한 그런 나라가 될 듯싶다.

© babybluecat, 출처 Unsplash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2021년은 자기 자비를 베풀어보는 예행연습의 한 해일지 모르겠다. 스스로 못마땅했던 나태하고 게으른 나의 모습, 계획대로 집요하고 세밀하게 일을 추진하지 못했던 무능력이 모두 어쩌면 내가 어디까지 나사 풀린 나를 용인할 수 있나를 테스트해 보는 과정이었는지 모른다.


개인적으로는 도저히 쳐다보고 싶지 않았지만, 그것도 다 내 속에서 나온 모습이었다. 세상 살이란 빈틈없이 완벽할 필요도 그렇게까지 성실하고 부지런할 필요도 없었는데, 기계적으로 습관적으로 나는 무작정 그렇게 살아야만 마음이 놓였고 쾌적했던 것이다. 다만 내 기분이 조금 찝찝하고 불안한 것 외에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한들 별 차이는 없다는 것이 여실히 증명되고 있을 뿐.

© pawel_czerwinski, 출처 Unsplash


그러니 내년에는 이 자기 자비를 조금 더 생활에 적극적으로 적용해 보기로 결심했다.

(역시 또 목표를 하나 만들어 냈구먼. 이렇게 하는 편이 내게는 마음이 안정되니까.)


무력한 갓난아기도 돌보아 봤으니,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 나조차도 너그럽게 껴안고 인정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이제는 한번 도전해 봐도 되지 안 갔소? 그럴 때가 온 것 같은데.


그래, 그렇게 하기로 한다. 그러면 한결 마음의 짐이 내려지는 느낌이 든다. 올 한해 나는 흡족한 마음이 들게 해낸 것이 없다. 그러니 그런 나 자신을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다독여 주는 일이라도 성공한다면 그건 필시 뚜렷한 하나의 성취가 되리라. 반드시 위너가 되어야만 하는 나의 궁여지책으로 그렇게 하나의 과제이자 소명이 새롭게 탄생하게 되었다.


남에게 하는 만큼 나에게도 너그러워져본다. 어차피 우리 사는 삶에 진짜 위너는 없다. 우리 모두는 진심 어린 위로가 필요한 루저들일 뿐. 그런 나라도 나는 사랑하련다.

© keilahoetzel,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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