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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이 인정이라는 포장으로 이용당할 때

조직에서 배신감을 경험하는 순간

  얼마 전, "스토브리그를 통해 찾아본 리더십 모델"이라는 글을 올리면서 '별주부  신드롬'에 대해 소개한 적이 있다. 낯익으면서도 생소한 이 개념은 자라의 속임수를 알아챈 토끼가 간을 다른 곳에 놓고 왔다는 비유를 빌어 회사에 출근할 때마다 더 이상 상처 받기 싫어 의도적으로 영혼을 놓고 온다는 젊은 세대를 의미하는 말이다. 나는 이 말이 단지 90년대생들의 비애라고 치부했었다. 그런데 직장 생활을 10년이나 넘게 해온 나 또한, 얼마 전 유사한 씁쓸함을 경험하고 나니 이들의 마음이 처절하게 공감이 되었다.


 얼마 전까지 나는 '일터에서의 삶'은 직무몰입과 소명의식과 같은 지극히 개인 내 인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 것으로 확신했었다. 그러나 최근 몇 달 간의 크고 작은 사건들을 통하여 외적 동기는 간과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사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동기는 단순한 두 가지로 구분되지 않는다.  외적 동기또 다시 자기 결정성에 근거한 비자발적(=통제된) 동기와 자발적 동기로 세분화될 수있 것이다.


*자기 결정성 이론에 의하면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율성, 유능성, 관계성 등 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하여 행동한다(Ryan & Deci, 2000).

동기는 심리학 분야에서 오랫동안 연구 주제로 선정될 만큼 중요한 개념이다. 동기는 크게 내재적 동기와 외재적 동기로 분류할 수 있는데 내재적 동기란 자기(Self)부터 비롯되어 경험되는 흥미와 기분, 즐거움, 그리고 몰입과 같은 정서와 연관된다. 반면, 외재적 동기는  스스로의 욕구를 만족시키거나 스스로를 즐겁게 하기 위한 행동이 아닌, 압력, 강압, 보상 등의 통제와 연관되는 개념이다.

<출처: 일터에서의 긍정심리학 활용하기>

  

  내가 그간 강조하였던 소명의식은 앞서 제시한 심리학적 관점에서는 '통합된 통제(integrated regulation)'로 설명이 가능할 것 같다. 통합된 통제란 스스로 수용이 가능한 자신의 가치, 신념과 일치되는 직무 행동을 하게 되는 경우를 뜻한다. , 직업의 가치와 나 스스로의 가치가 일치되는 것이다. 쉬운 예로 백종원을 들 수있다. 그는 골목식당을 누비는 과정에서 전국 각지의 요식업 사장님들을 찾아가 노하우를 전하는 것이 육체적으로는 꽤나 힘들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삶과 일을 깊이 연결시켜 사명감을 느끼게 되어 성취감과 보람을 경험할 수있다. 이러한 행동은 자기가 결정하고 행동하는 근원이 내적인 동기에서 나타나는 즐거움과 에너지가 된다. 따라서 가장 자기 주도성이 높은 자발적인 행동으로 설명될 수 있다.


  다시 나의 경험으로 돌아가서 요 몇 주 간 나를 힘들게 하였던 부분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나는 스스로 '통합된 통제'에 의해 움직이며 일하고 있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리더 이러한 나의 선한 동기를 악용하여 더 과도한 직무와 책임감을 부여하였다는 사실을 직면하게 되면서부터 일터에 대한 충성도가 급격하게 떨어졌다.


   그동안 나 스스로 리더가 아니면서도 리더만큼 일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성취감을 느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취약계층과 그들을 위해 돕는 현장 전문가들을 지원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열심 한 걸음 뒤로 물러선 리더를 통하여 암묵적으로 강화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더는 팔로워의 자율성을 허용하여 주는 '마음 좋은 지도자'라기보다는 단지 내재화된 동기인 자율성을 이용하는 '전략가'였다는 사실에 절망감이 들었다.


  이러한 마상은 연휴가 길면 일을 하고 싶어 근질거렸던 나의 육신을 시체처럼 바닥에 나뒹굴게 만들었다. 또아침이 되어도 회사 가기 싫어서 몇 번이나 알람을 끄고 켜고를 반복하게 만드는 놀라운 기적을 야기했다. 그로부터 몇 주가 지나기까지 조직을 비롯한 직무에 대한 나의 '열정'이 자율성 '인정'이라는 포장으로 보기 좋게 이용당했다는 생각이 앞선 것이다. 그리고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믿어왔던 리더에 대한 불신과 배신감에 헤어 나오지 못했다. 이때 내가 한 일은 이전처럼 억지로 '괜찮은 척' 애쓰는 것이 아니라 아프면 아픈 대로 내버려 두고 아픔과 상실감을 온몸과 마음으로 느끼는 거였다. 이러한 힘듦을 극복해내기까지 장시간 함께 대화해준 나의 최측근 지인, 상담 전문가 K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코이의 법칙 "사람은 믿어주는 만큼 잘 하고, 애껴주는 만큼 여물고, 인정하는 만큼 더 열심히 해야한다." 씁쓸하지만 김사부와 같은 리더는 드라마에만 존재함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런데 감정이 어느 정도 누그러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좀 더 냉정한 시각에서 나의 경험이 새롭게 해석되기 시작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상대방에게 이익이 되는 행동을 하곤 하는데, Blau(1964)가 주장한 '사회 교환 이론'에서 바라본다면, 나의 이 비통함은 그렇게 억울해할 만한 일도 아닌 셈이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리더는 내가 그동안 조직을 통해 맛보지 못했던 '자율성'이라는 외적 보상을 제공하여 주었고, 이렇게 허락된 자율성은 다시금 나에게 동기부여 유인책으로 작용하였다. 반대로 리더는 그동안 쉽게 경험하지 못했던 찐열정 팔로워인 나에게 '자율성'을 부여하였고 이러한 자율성을 기반으로 일한 나의 직무몰입은 조직 내 긍정적인 성과를 갖게 하였다. 쉽게 말하자면 서로 필요한 것을 주고 받은 셈이다.


  당장 일을 그만둘 생각은 없기 때문에 나의 이러한 해석은 일터에서 생존하기 위한 아니, 살아내야 하는 을의 입장에서 다분히 합리화적인 경향이 없지 않다는 것을 안다. 또한 해석이 아름답다고 하여 나의 뼈아픈 경험들이 다 씻겨 내려갈 만큼 아무것도 아닌 것도 아니다.


  그러나 눈물과 콧물을 씻으며 한 뼘 아니, 한 마디만큼 더 성장한 직장인으로서의 나를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우리 중 누구도 '스토브리그'의 백단장 같은 합리적인 선택과 성공을 담보하는 과감한 전략 수행 능력이 있지 않고, 또 우리 중 누구도 '낭만닥터 김사부'의 닥터 부용주와 같이 초지일관 사람을 신뢰하고 생명을 존중하며, 가장 중요한 본질을 놓치지 않는 선한 가치관을 유지하지는 못할지라도 미생처럼 하루하루 버텨가는 우리들의 삶에서 작은 의미 하나, 희망 하나를 발견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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