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나게 된 K는 메디컬 빌딩을 소유한 건축가 집안의 장남이었다.의료인 며느리를찾는다고 했다. 이런 배경은 평범한 내 주변에선 절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어서 신기할 따름이었는데 그가 나와의 매칭을 원한다는 것이 더욱 놀라웠다. 나이차도 2살밖에 안 났고 보정된 사진이었지만 웃는 인상이 선해 보였다. 말끔하게 차려입고 사진관에서 찍은 듯한 프로필. 그와의 첫 만남은 손목까지 오던 소매가 땀이 약간 베인 팔뚝 위로 스칠무렵이었다.
이전까지 소개팅을 한건 손에 꼽았다. 대학 땐 과씨씨를 2번 했고 이후에도 자연스러운 만남이 대부분이었다. 어쩌다 지인을 통해 연락처를 건네받으면다소 높은 확률로 연애로 이어졌기에 성공률이 10%밖에 안된다는 풍문이 다소 의아스러웠다.
아직 차가 없는 나를 배려해 그는 한 시간 반정도 걸리는 거리를 먼저 오겠다고 했다. 고마운 마음에 더욱 늦으면 안 될 거 같아 다소 일찍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형제의 결혼식을 위해 샀던 아끼는 검은색 원피스의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화장을 고치는데 이내 카페의 문이 열리고 이미 낯설지 않은 얼굴의 남자가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결혼정보회사에선 매주 2명의 프로필을 보내준다. 쌍방이 수락하면 만남이 성사되고 매회 횟수가 차감된다. 나는 기본 5회에 서비스 6회까지 총 11회의 매칭을 약속받았다. 그러나20대 후반의 전문직이었던 나는 운 좋게(?)많은 보너스 프로필을 받아 볼 수 있었다. 즉 만남이 성사되더라도내 횟수는 그대로이고 상대 것만 깎이는 시스템이다. 나는 서울과 본가 둘 다 매칭 지역으로 설정해 뒀는데지방에서 내 프로필을 보고 난리가 났다며 매니저는 호들갑스레 나를 띄워줬다. 그나마 어려서겠죠? 하하. 어디서 주워듣기론 그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더 나은프로필을 물어다 준다 했다. 그러기 위해선 별로 내키지 않는 미차감도나가는 게 좋다나. 근데꼭 그렇게까지 해야 돼?
첫 번째 약속을 잡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메일이 도착했다.
"선생님이 분한번 만나보시는 게 어떨까요?"
"일하는 중이라 확인해 보고 연락드릴게요."
환자를 빠르게 쳐내고 진료실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럴 일은 없지만 누군가 보고 있진 않을까잠시주변을흘끗거리다 메일함을 클릭했다.어떤 사람일까. 사진, 키, 직업, 출신 학교, 자산, 부모님 직업 등 누군가의 일대기를 요약해 놓은 한 장의 페이지를 살피는 건 막 시세를 분출하려는 차트를 보는 것만큼이나몰입도가 높았다.친구 중 한 명은 결혼 정보 회사 직원이 돼서 마음껏 데이터 베이스를 열람하고 싶다 했는데 그 우스갯소리가 이해되는 바였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알기 어려운 내밀한 속사정까지 알 수 있으니까.
당시 나는 밤에 누우면 어깨가 아파 잠이 안 올 정도로 고강도 일에 치였지만,눈 뜨자마자확인한 주식 잔고는 이직으로 인한 월급 상승분을 하루 만에 토해내곤 했다. 내가 뭐 하고 있는 거지? 밀려오는 회의감에 출근길발걸음은 푹푹 처박히는 듯했다.그중에검은 화면 위로 솟아오르는 네이버 알람이란 팍팍한 현실 속에서 유일하게 도파민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경험해 본 적 없지만 훈련소에서여자친구의 편지를 받는 느낌이랄까. 이 중에 나를 구해줄 왕자님도 있지 않을까 하고 매일 희망회로를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화면에서 그를 처음 마주했다. 흠, 인상은나쁘지 않은데? 그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으리라. '30대 중반의 자가를 가진회사원'딱히 미안하지는 않은 게 그도 나를 20대 후반의 메디컬 전문직으로 인식해서 '프러포즈'를 보냈을 테고이런 업체에선객관적인 지표가 그사람을 대표하는 거니까. 다만 직업도, 종교도, 나이도 지금까지 만나온 부류가 아녔기에 며칠간 결정을 보류했다. 그러나 그는 '보너스' 프로필이었고 내가 손해 볼 건 시간뿐이었기에 고민 끝에 매니저의 꼬드김에 넘어가기로 했다. 2년 전의 나는 무력함에서 벗어나게 해 줄 활력소가 필요했고그냥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재밌을 것 같았다. 뭐든 해보는 게 낫지. 인연일 수도 있고 아니면 거절하면 되니까. 그러나 무심코 한선택이 어떤 나비효과를 불러올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마침내 지긋지긋한 서사의 막이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