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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땡땡 Jun 04. 2022

생각이 너무 많아 머리가 터질 것 같아요.

보름의 생각할 시간, 유예기간



백수 7일 차, 내겐 숙제가 있다. 회피해 오던 문제에 결론을 내려야 하는. 하루가 달리 줄어가는 통장 잔고에 반비례하게 마음의 짐은 점차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서울에서는 뭐가 맞는지 도저히 모르겠어서 본가에 내려왔다. 가만히 누워있으면 지저귀는 새소리, 닭 우는 소리가 들리는 녹음이 무성한 푸른 곳. 여기서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아니 내려야만 한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느리게 간다. 나에겐 생각도, 시간도 너무 많다. 사람들 속에 둘러싸여 바쁜 발걸음을 옮기며 동영상 강의를 듣던 출근길을 벗어나, 넓은 2층 집을 온종일 혼자 채우고 있으려니 이상하게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11일밖에 안 남았는데.


무언가 진득하게 집중할  없으니 머릿속 세포 하나하나 마다 저마다의 주장을 펼치며 싸우기 시작한다. 사공이 너무 많으니 이리 갈까 저리 갈까 하다 역시 아무 데도 가지 못한다. 오전이 거의 끝나갈 무렵, 늘어져있던 몸을 일으켜 옥상 테라스로 향한다. 생물이니까 광합성을 해야지. 초여름의 태양은 따스함을 넘어 뜨겁기까지 하다. 말간 하늘 위로 다양한 장면이 어지러이 떠다녀서 눈을 감았. 햇볕 아래 대자로 뻗은 나를 바싹 말리고 싶다. 뇌에 수분기 하나 없이 잡념들이 모두  짜졌으면 좋겠다. 내가 소독됐으면 좋겠다. 잡스런 것은  사라지고 깨끗한 것만 남았으면.


 시간쯤 지났을까. 나는 자외선으로 소독될  없음을 깨닫고, 직접 몸에서 내보내기로 했다. 뛰는 거다. 헬스장에 도착했다. 간단한 준비운동  러닝머신 앞에 서서 신발끈을 고쳐 묶는다. 한때 코로나가 심할 무렵 달리기 속도를 6km 제한했던 적이 있는데 그때 너무 슬펐다.  속도로는 머릿속을 비울 수가 없다고요. 적어도 ' 진짜 못하겠다'라는 말이 턱밑까지 가득 차야만 잡념이 잠시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인간은 간사해서 육체가 고되야만 번뇌가 사라지는  같다.


다리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호흡이 가빠진다. 전신에서는 차차 땀방울이 흘러내린다. 씻지 않아도 씻겨 내려가는 기분. 불필요한 것들은 다 빠져나가고 정제된 나만이 남기를 바라며 조금 더 속도를 올려본다.



다시 집. 친한 관계라면 누구의 집이든 내가 습관처럼 하는 행동이 있다. 바로 냉장고 열기. 들어서자마자 부엌으로 향해 1시간 전과 비교해 변했을 리 없는 냉장고 안 내용물을 살핀다. 뭐라도 하나 집어낸다. 분명 먹기 전엔 허한 느낌이었는데 빠르게 밀어 넣고 나니 속이 더부룩하고 배가 빵빵하다. 트림을 해봐도 불편감은 가시지 않는다. 앉아있으면 배가 더 빵빵해 보인단 이유로 소파에 누워버린다. 가득 찬 머리와는 달리 텅 빈 흉부를 음식으로 채워놓고자 했던 미련한 이의 결말. 그런데 신기하게 먹고 나면 늘 얼마 지나지 않아 배에서 신호가 온다. 화장실을 거쳤다 나오면 다시금 허해진다. 이상한 일이다. 이내 되풀이하듯 냉장고 문을 열어본다.


리모컨을 집어 들어 TV 켜본다. 딱히 구미를 잡아당기는 것이 없다. 예능프로그램에 잠시 관심을 두다 이내 집중력이 흐려져 채널을 돌리던 리모컨을 내팽겨 친다. 부모님이 돌아오시기를 기다리며, 노트북을 열어  화면을 펼쳐본다. 이성적이고 객관적으로 각각의 경우를 써 내려가야지. 꼿꼿이 앉아 무수히 많은, 전혀 그려지지 않는 미래의 가능성들을 가늠해 보려 노력한다. 인터넷 커뮤니티에 글을 올려보기도 하고, 친한 친구들에게 카카오톡이나 전화로 조언을 구해보기도 한다. 수십수백 가지 저마다의 의견이 나온다. 오전엔 한쪽이 우세해서 그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저녁이 되어 누군가  한쪽의 편을 들면 그게 좋아 보인다.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철새처럼 오락가락한다.


차라리 어쩔 도리 없는 일이 생겨 한쪽을 따라야만 하는 게 나을 듯싶다. 선택지가 아예 하나라면 이렇게 머리 아프지도 않을 텐데. 자유의지로 하는 선택에는 후회가 따르기 마련이니 되려 주관이 거세된 상황을 바라는 주체성 없는 모습. 그것이 내가 이곳에서 마주한 나의 민낯이다. 그런 나를 알아차린 듯 많은 댓글 중 정곡을 찌르는 문구가 보인다. '스스로가 원하는 게 뭔지 알아야 해.' 그렇다. 결정은 오로지 내 마음의 소리를 따라야 하며 따르는 결과는 모두 내 책임이다.


나는 일생을 바꿀 수 있는 선택의 경계선을 밟고 있다. 어떠한 물결에 의해 한쪽으로 기울어졌으면 좋겠는데, 그런 일은 생기지 않는다. 스스로 발을 떼야한다. 푸르스름한 하늘에 붉은빛이 드리워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훗날 이 글을 다시 보게 됐을 때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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