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만년필을 항상 지니고 다닙니다. 필기구가 준비되어 있는 회의나 모임에 가더라도 웬만하면 만년필을 사용합니다. 적어도 한 자루는 셔츠나 안주머니에 한 자루는 가방 파우치 안에 항상 두려 애를 씁니다.
만년필 없이 집을 나서면 마치 지갑 없이, 핸드폰 없이 길을 나선 것 같은 불안감이 생깁니다. 종일 들고 다녀도 한 번도 사용하지 않는 날이 더 많지만 그래도 챙겨 다닙니다.
그렇다고 고가의 명품 시계나 명품 키링을 들고 나서는 마음과는 또 다릅니다. 명품이 주는 물질적 자심감이나 자존감이 아니라. 그냥 오래된 벗과 동행하는 안정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잃어버려도 덜 아까운 만년필, 저가의 만년필들을 가지고 다닙니다.
나는 만년필의 애호가입니다.
하지만, 고가의 만년필을 소장하고 거래하는 취미와는 결이 좀 다른 것 같습니다.
합리적이지도, 실용적이지도 않는 내가 만년필을 사용하는 이유를 소개할 까 합니다.
정작 회의라도 하게 되어 만년필을 꺼내면 잉크가 나오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만년필을 꺼낸 체면에 만년필 잉크가 나오지 않는다고 아무 볼펜이나 들고 적기에는 자존심에 스크레치가 납니다.
그래서 언제든 막히지 않은 상태로 만년필을 사용하려고 일상에서 습관적으로 무언가를 끄적입니다. 낙서이기도 하고 메모이기도 하고합니다. 요즘은 드로잉북을 가지고 다니면서 그림을 그립니다.
그렇게 라도 자주 만년필을 사용해 주어야 잉크의 흐름이 항상 좋습니다.
잉크가 자주 막히기 때문에 더 자주 만년필을 사용하게 됩니다.
얼마 전 강의를 시작하려는 순간, 컨버터의 결합이 제대로 안 되었던지 만년필을 꺼내는 순간 주르르 잉크가 쏟아져 흐르는 바람에 수습하느라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화장실로 달려가 만년필을 씻고 양손에 묻은 잉크를 지우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손에는 잉크가 덕지덕지 묻어있고 혹여나 다른 곳에 잉크가 묻어 있나 살펴보느라 한참을 헤매었습니다. 다행히 옷과 가방에 더 이상 잉크가 흘러내리지 않은 것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정신없는 와중에 화장지에 곱게 싼 만년필은 집에 와 보니 베럴은 온데간데없었습니다. 강의 역시 시작부터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평상시에 늘 잉크를 채운 후에는 베럴을 꽉 잠그는 것 컨버터의 접속을 재차 확인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더라도 가끔 이런 일이 한 번씩 생깁니다.
그렇게 또 만년필 하나를 보냈습니다.
잉크가 가끔 새기 때문에 항상 만년필을 더 자주 들여다보게 됩니다.
중학교 입학선물로 받은 첫 만년필 '아피스 금장‘은 학교에 들고 간 그날 사라져 버렸습니다 까까머리 어리숙한 신입생의 교복 주머니에 자랑스레 번쩍이는 만년필은 먼저 보는 사람이 가져가라는 이야기나 다름없었을 것 같습니다.
그 후로도 많은 만년필들이 학창 시절 내 곁에 왔다가 떠나갔습니다. 그리고는 한동안 만년필과의 인연이 없었지만. 최근 십여 년 전부터 라미만년필 3~4개는 내 곁에 왔다가 언제인지 모르게 사라졌습니다. 물론 사용하다 펜촉이 상해 못쓰고 버린 것도 있고, 베럴이 깨져 버린 것도 있습니다.
10여 년 전부터 시나브로 다시 만년필을 접하게 된 이후부터도 더 많은 만년필이 왔다가 사라졌습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은 최근에 구매하는 만년필은 고가의 만년필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저가의 만년필 잃어버려도 아깝지 않을 것 같은 만년필만 삽니다.
하지만, 잃어버리면 아깝습니다. 속이 상합니다. 경험상으로 잃어버려도 아깝지 않은 만년필은 잘 없습니다.
만년필은 자주 잃어버리기 때문에 더 자주 챙기게 됩니다.
집에 잉크도 몇 개씩 준비해야 합니다. 많은 만년필 애호가들은 만년필만큼 다양한 잉크를 사용하고 모으는 취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의 경우는 특별히 다양한 색상의 잉크의 매력을 느끼지 않기에 그림 그리기에 적합한 방수잉크 몇 종류, 그리고 기본적인 몇 브랜드의 잉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방수가 되는 물감이 번지지 않는 잉크를 사용해야 합니다. 얼마 전 방수잉크가 들어있다 착각하고 밑그림을 그렸다가 물감을 올리는 순간 완전히 번져버려 그림 한 점을 망쳐 속이 상한 적이 있습니다.
마음 같으며 이 만년필은 방수잉크, 이 만년필은 몽블랑미드나잇 블루 이렇게 정해 놓고 사용할 것 같은데, 쓰다 보면 그렇게 잘 되지 않습니다. '이 만년필에 이 잉크를 넣으면 어떤 필기감이 생길까' 하며 수시로 잉크를 바꿔 넣게 됩니다
그렇지만. 용도와 상황에 따라 심지어 기분과 분위기에 따라 여러 가지의 잉크가 필요해집니다.
최대한 자제를 해 보지만, 적어도 몇 종류의 잉크는 가지게 됩니다.
만년필과 상황 사람에 어울리는 잉크를 찾아 더 많은 탐구를 하게 됩니다.
잉크가 막히거나 새거나, 혹은 잃어버릴 경우를 대비해서 여분의 만년필을 가지고 다녀야 합니다.
그러고 나의 경우에는 글씨를 쓰는 용도의 만년필, 그리고 그림을 그릴 때 사용할 만년필이 필요합니다.
보통 외출 하게 되면 기본적으로 두 개, 방수잉크가 들어있는 그리기용 만년필, 메모나 필기를 위한 일반잉크가 들어있는 만년필을 챙깁니다. 그렇지만, 본격적으로 출장이나 드로잉을 나가게 되면 그리기용 두 개 메모용 두 개는 필수가 되어 버립니다.
만년필마다 필감이 다를 뿐 아니라 펜촉의 굵기에 따라 다 다릅니다. 평소 범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정도의 것들을 챙기지만, 다양한 굵기 다양한 종류의 만년필이 항상 아쉽습니다.
그림을 그릴 때도 굵게 밑그림을 그리고 싶을 때가 있고 가느다란 선이 필요한 날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경우를 위한 미공필 종류도 있지만, 이 역시 또 하나의 장르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꾸자꾸 다양한 만년필이 필요하고 집을 나설 때도 다양한 만년필들을 지니고 싶어 집니다.
만년필을 사용하면 여러 가지 상황을 대비해 더 다양한 만년필을 찾고 경험하게 됩니다.
만년필을 들고 다니면 종이도 신경 쓰게 됩니다. 너무 얇거나 비치는 종이는 뒷면이 배어 나와 사용하기 힘듭니다. 문구광은 아니지만, 자연스레 다이어리, 노트, 메모지에 깐깐해지기 시작합니다. 만년필 전용지를 챙기는 정도에 까지 이르지 않았지만, 적어도 펜촉이 잘 미끄러지는 종이, 잉크의 흐름이 좋은 종이는 가리게 됩니다. 요즘은 워낙 지질들이 좋아져서 만년필을 사용하기 힘든 종이가 잘 보이지 않지만, 같은 상황이면 만년필의 펄감을 느끼고 즐기고 싶어 지게 됩니다.
사실, 요즘 회의는 거의 아이패드를 사용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년필을 챙기고 메모할 노트를 챙깁니다. 만년필을 사용하면 가방이 점점 무거워집니다.
만년필을 사용하면 종이와 파우치 가방에 이르기까지 세계관이 확장됩니다.
들고 다니기 편하고 그림 그리기 편한 몇 개 가성비 좋은 놈이면 끝날 것 같은데 자꾸 비싼 놈에 눈이 갑니다
비싼 만년필 잃어버린 후의 상실감을 모르지 않지만, 맘에 드는 만년필을 가졌을 때의 기쁨은 너무나 큽니다.
고가의 만년필을 소장하는 취미에 이르지 않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명기라 불리는 좋은 만년필, 오래된 빈티지 만년필들을 보면 매대를 한동안 떠나지 못합니다. 만년필이 전시되어 있는 매장에 가면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비록, 항상 고급기는 구매하지 못하고 돌아서지만, 아쉬움 보다 그 시간이 즐겁습니다. 가지지 못하는 속상함 보다 사랑하는 이를 바라보고 돌아서는 애틋함이 있습니다. 가지지 못해도 행복합니다.
만년필을 사용하면 사지도 못할 물건을 한참 동안 바라보는 행복한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언젠가 중학교 시절 친구와 나눈 우정의 편지를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초록색 잉크로 정성스레 써 내려간 어린 시절 편지 속 나의 만년필 글씨를 읽고 미소를 지었던 기억이 납니다. 만년필 글씨는 기억과 추억을 보다 아름답게 자극해 줍니다.
자주 잃어버린다는 것, 아마도 볼펜은 만년필과 비교 조차 할 수 없이 잃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 기억 속에 잃어버린 만년필만 존재한다는 것은 그만큼 소중했었다는 것 그리고 그 소중함을 지켜내지 못한 아쉬움이 지금까지 남아있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잉크를 쏟기도 하고 만년필을 떨어트려 펜촉을 못쓰게 만들기도 하고, 정작 써야 할 상황에 말라버려 사용하지 못하는 난감한 상황을 만나기도 하고 매번 잉크가 마르지 않게 사용하고 또 잉크를 채울 때마다 만년필을 씻고 말리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만년필을 사용한다는 것, 한마디로 불편함 그 자체입니다. 그렇지만 만년필이 주는 만족감은 다른 무엇과 다른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음악 한곡을 듣기 위해 재킷 속에 LP를 꺼내 소중히 닦고 턴테이블에 고요히 올리고 음악을 듣고 난 후에도 이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 핸드폰만 있으면 언제든 무한정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시대지만. 기꺼이 불편함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
단지, 아날로그와 디지털로 구별하거나 비교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할 때 얻는 만족감 그리고 자긍심.
내가 만년필을 사용하는 것은 진짜 이유는 비록 저가이지만 내 자존감을 무한의 그곳까지 끌어올려주기 때문인가 봅니다.
이제, 만년필을 옛날처럼 자주 잃어버리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혹시 잃어버릴 것을 대비해 저가의 만년필만 가지고 다닙니다. 최근에는 주로 홍디안 920s, 라미사파리, 파커조터 정도를 갖고 다닙니다. 홍디안 920s는 그림 그릴 때 라미사파리는 일상의 메모, 파란색 파커조터는 그냥 가지고 다닙니다.
특히나 홍디안 920s는 정말 만원의 기쁨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잉크의 흐름이 좋아 드로잉 북에 항상 꽂혀 있습니다. 조만간 다른 색깔로 몇 개가 내 만년필 파우치를 채울 것 같습니다.
홍디안 1851도 그러합니다. 얼마 전 잃어버렸습니다. 아무리 저가이지만 속상하고 아깝기는 매한가지입니다. 특히, 이번 홍디안 1851은 만족도가 너무 높았기 때문입니다. 조만간 홍디안 1851은 다시 채워져 있을 것 같습니다.
내 곁을 지키는 만년필은 싸게는 만원 비싸게는 4~5만원을 넘지 않는 만년필들입니다.
불편하다는 단어는 거북하고 번거롭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북하다는 뜻은 자연스럽지 않고 자유롭지 않아 어색한 상태를 말합니다.
항상 관심을 주지 않으면 자신의 일을 거부하는 만년필, 수시로 잉크의 양도 점검해야 하고, 항상 사용하면서 잉크의 흐름이 좋도록 유지해야 합니다. 만년필을 사용한다는 것은 거북하고 번거롭습니다. 하지만, 일상에서 거북하고 번거로운 일을 반복하면서 얻는 행복을 알게 해 줍니다.
나는 비싼 비용을 치르며 불편할 자신은 없습니다. 하지만 비교적 저가의 만년필을 가지고 견딜만한 적당한 불편함을 통해 자존감을 올리고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일상의 만년필 사용이 정말 즐겁습니다.
내게 관심과 애정을 구하는 작은 만년필 하나 몸에 지니고 적당히 견딜만한 불편을 감수하고 나서는 길. 생각보다 더 많이 행복할 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