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우치다 타츠루
불씨는 많은 것을 만들고 정교화한다.
구조를 배태할 고치이다.
암흑과 무지를 밝히고, 육신을 덥히고, 철을 달구고, 가능성을 녹여내고, 섞어내고, 합금하여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낸다.
불의 곁에 있는 한 인간이 무력(無力)을 극복하고 물질을 너머 밝혀진 정신을 또렷이 응시해 본다. 그것을 선명하고 정교하게 들여다본다. 이윽고 선명해진 정신은 정교한 구조와 새 이름, 그리고 질서를 만든다. 그렇게 불은 인간이 대지와 더 밀접히 관계 맺을 수 있게 하는 최초의 직조기다.
불을 처음 쥔 인간, 만드는 인간이란 이명을 지닌 '호모 에렉투스'를 기준으로 인류 '사회구조'의 기원을 둔다면, 현재의 복잡한 사회구조는 사피엔스를 한참 더 거슬러 180만 년의 아득한 시간을 거쳐 지금의 형태에 이르렀다 볼 수 있다.
만일 한 세기 한 세기가 한 올의 구조라는 이름의 실가닥.
그 실의 직조가 인류를 통과해 수백만 번의 횡단을 거쳤다면, 여과할 틈 없이 복잡하고 촘촘한 거대 그물망의 형태가 되었을 현재를 그려본다. 구조가 생기는 지점을 한 세기로 보는 건 사실 느슨한 상정이라고 해도.
헌데, 이 상상이 어딘가 씁쓸한 것은 직접 구조를 직조하다 제 몸을 함께 꿰어버린 주인들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인간이 영원을 산다면 구조를 해체하는 데 좀 더 유리했을지 모른다. 어디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쉬울 테니. 하지만 우리는 찰나를 살기에, 삶을 넘겨받기에, 계속 새롭게 시작하기에, 구조를 파악하는 것을 미루고 구조를 새로 짓는 데에만 급급한지 모른다.
나를 둘러싼 실이 어떻게 매듭지어 있는지 그 구조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자유의지 실현을 위한 전진이나 옆사람과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무척 진을 빼게 될 것이다. 결국 암울하지만 힘을 더 빼고 싶지 않기에 간극을 좁히기를 단념하고 제자리에 머물거나, 현 상황을 잊을 다른 것에 현혹되거나, 하나의 현상에 매몰되어 분노하거나, 제 몸의 그물만을 끊어내는 자기만의 작업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등골이 한층 더 서늘해지는 건, 이런 부작용은 대수롭지 않은 듯 탄력 받은 실은 서로를 빠르게 가로지르며 직조를 멈출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무엇이든 가속화된 현재를, 그리고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는 한 땀 더 떠 불안정이란 탄성까지 장착된 그물망, 마치 트램펄린 매트 위에 놓여 있는 듯하다. 아이들처럼 해맑게 즐길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런저런 무거운 배낭을 멘 어정쩡한 어른인 나는 제 몸을 잘 가누지 못하고 반동에 의해 이리저리 튕기고 있을 뿐이다.
우리 모두 공유하고 있는 불안정성이란 이런 모습이 아닐까.
때로는 자각하지 않으면 매 순간 내 몸을 반동에서 통제하거나 중심을 잡기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구조를 파악하는 게 사치이자 사변적으로 치부되는 것 역시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인류는 자신이 지닌 가치를 옆사람과 나누지 못하고 고독히 평행선만 바라보다 소멸할 것이다. 더 이상은 상상이 아니다. 우리 자신의 일상이나 주변의 모습과 닮아있지 않은가.
각자도생만 추구하다 유대와 진짜 사랑을 잃고 사멸한 외로운 인간들, 현생 인류를 '호모 론리니스(Loneliness)'로 명명해 기억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스스로를 외롭게 하고, 타인을 외롭게 만드는 ─소통할 수 없는─ 인간이 되지 않으려면 '자기의식'에 대한 앎이, 세계와 자신이라는 개념을 끊임없이 의심·질문해서 답을 찾아가는 데카르트식 여정이 필요하다.
그런데 자기의식이란 무엇일까?
새삼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실 '나(우리)' 즉 '자기의식'은 내가 생득적으로 갖고 있거나 나로부터 100% 추출되어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세계(사회)안의 존재로서 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의식이 형태를 갖추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 세계는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가?
자기의식에 대한 앎은 곧 세계에 대한 탐구다. 우리를 이루고 있는 구조를 알아야 할 이유가 여기서 나온다.
저 물음들에 대한 힌트가 구조주의 속에 존재한다.
생각하고 말하고 판단하는 것이 생각보다 자유롭고 객관적이지 않으며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언어적 구조 안에 영향을 받는다고 구조주의 철학가들은 설명한다. 실존과 의지보다 구조가 앞선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내가 지금 사는 세계, 국가, 도시, 문화, 신념, 삶의 방식 모두 민족지적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고, 당신이 옳다고 굳게 믿는 것이 사실은 당신의 세계에서만 당연하고 다른 세계에서는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새삼스럽게 씁쓸해지지만 여기서 내가 담아갈 것은 무엇일까?
구조의 한계에 대한 답답함? 거리의 파토스 같은 시각? 나의 한계? 혹은 좌절과 불만이나 분노? 단념과 냉소일까?
아니다. 그 구조 자체를 인식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불합리한 구조 안에서 휘둘리지 않고 타인과 잘 공생하려 노력하는 것. 나와 다른 구조에 있는 이를 이해해 보려는 시도. 또 내 선택이 당시에 옳았다고 믿는다면 두려워 말고 행해야 한다는 다짐이다.
그래서 시대적으로 사상의 대결과 성패를 나눈 것 같이 표현되는 실존주의와 구조주의는 실은 이항 대립적인 것이 아닌 듯하다. '주어진 상황의 결단을 통해 자기 형성을 한다'는 두 철학의 공통점처럼, 분명 우린 구조에 영향을 받고 존재의지(실존과 선택)도 도착될 때가 많지만, 역설적으로 그 구조를 인식하고 바꿔나갔던 것도 역시 인간이었기에, 한 인간인 나로서 실천할 수 있는 것은 "구조 속에 있더라도 실존적 의미를 찾아 나의 안과 밖을 들여다보며 선택하자"라는 답을 찾았고 계속 되뇌어본다.
우리를 이루는 구조 중 가장 대표적인 건 '언어'다.
매일 일상의 경험과 감정, 그리고 예측. 우리는 그것을 언어로 표현한다. 이렇게 보면 선후관계가 경험→ 언어라는 인식은 자연스럽다. 그렇지만 분명, 우리는 언어로는 다 담지 못할 순간이나 감정을 만나곤 한다. 내가 내뱉는 건 생각의 흐릿한 흔적일 뿐.
사실 사고라는 것 자체가 언어라는 구조물을 통과하지 않고는 ─내가 의식할 수 있는─ 형태를 갖출 수 없기 때문에, 미처 표현되지 못한 것이 잔재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구조주의 언어학의 대표학자인 '페르디낭 드 소쉬르(1872-1913)'가 가르쳐 준 대로 일련의 상황을 파악해 본다면, 좀 더 정확한 작동 순서는 *언어→ 경험이라는 것이다.
(*언어가 사고를 '결정'하거나 언어가 없다면 사고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또 위의 느낌이 잘못된 것이 아닌 게, 나의 모국어가 일종의 여과망이기 때문이다. 내면이나 생각이라는 것도 애초에 모국어의 메커니즘으로 작동되고 있으니 생각의 공정 자체가 하나의 기계 브랜드(한국어)를 채택해 운용되고 있는 셈이다.
또 다른 비유를 들자면 내 생각을 '번역'할 수 있는 수단이 바로 언어(모국어)라는 것.
그런데 번역이라는 행위 자체에는 한계가 있다. 최대한 원문과 '가까운 느낌'을 주기 위해 번역가들은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는가. '원문 그대로'가 아니라 '가까운'이라고 표현한 것은 완벽한 일치란 번역가들도 인정하듯 불가능한 말이기 때문이다. 원문과 번역은 완벽히 같을 수 없다. 다만 번역가의 언어 구조, 문화적 구조, 이데올로기, 그리고 끈기 안에서 탄생한 하나의 창작으로서 또 다른 가치를 지닐 뿐.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의 저자이자 20여 년간 번역가로 잡히지 않을 수많은 흰고래들을 만난 홍한별 작가의 언어를 빌려 번역이란 작업의 공허와 진력을 느껴본다.
목에 걸린 가시를 뱉어내려 안간힘을 쓰는 느낌이었을까.
아닌가, 그보다 더 거대한 층위의 불가항력. 지평선 너머에 끝이 있다 믿으며 끝없이 노를 젓는 기분일까.
"고등학교를 다닐 때 미술 선생님이 하얀 석고상을 그리라고 시킨 일이 있었다.
(...)
흰 도화지와 시커먼 연필을 가지고 어떻게 하얀 것을 그리라는 걸까. 막막했지만 흰 종이에 더듬더듬 선을 그어 형상을 흉내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손을 댈수록 석고상의 그림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흰색을 그린다는 불가능한 과제.
수업 종이 울리고 고개를 들어보니, 나를 포함한 예순 명의 아이들이 전부 시커먼 형상을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저마다의 좌절감을 담은 그림 예순 장.
흰 석고상을 그린 검은 그림은 번역 불가능성의 증거다. 이게 이렇게 생겼는데, 눈에 뚜렷이 보이는데, 왜 종이에 그려지지 않나. 이게 이런 뜻인데, 너무나 빤한데, 왜 글로 옮겨지지 않나."
─
"책을 만드는 과정에 저자, 출판사, 편집자, 역자 등 여러 주체가 개입하고 품질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은 저자일 테지만 사람들은 어째서인지 원문은 훌륭한데 번역 과정에서 손실이 일어났다고 여기고는 한다. 번역의 본질이 그런 것이라고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듯하다.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다. 흰 고래 같은 글을 생각해 보면."
─
“『오뒷세이아』 4장에 나오는 해신(海神) 프로테우스는 사자, 뱀, 나무, 물 등 어떤 모습이라도 될 수 있지만, 온 힘을 다해 꽉 붙들고 절대로 놓아주지 않으면 변신하기를 포기하고 진실을 들려준다. 번역도 때로는 그렇게 꽉 붙드는 일이다. 무수히 변하는(폴리트로폰) 원본을 고정하고 틈새에 스며있던 의미까지 꽉 짜내어 진실을 듣기 위해서”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中
도달할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계속 다가가는 삶의 태도. 놓치지 않기 위해 꽉 붙들어내는 악력이 번역이다. 닮은 것이 있다. 내 생각을 언어로 번역할 때 흐릿한 말로 내뱉지 않으려는 태도, 결국 나아가 인간이 구조를 파악하려는 의지.
나는 이것을 다시 공예의 언어로는 금속을 계속 벼려내고 두드려 원하는 형태를 만드는 '단조(鍛造)', 융의 언어로는 불완전한 자신을 인정하고 자기 통합을 거쳐가는 과정인 '개성화'라 번역한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련,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은 원경으로 물러난다. 범속한 인간이 초월을 경험하는 순간이다.
자아가 어떤 때보다 커다란 의미로 육박해오는 경험은 시간이 충분히 흐른 후에야 언어로 옮길 수 있다. 언어로 옮겨진 후에야 비로소 그것은 생각이 되어 유통된다.
생각과 경험의 관계는 산책을 하는 개와 주인과의 관계와 닮아있다. 생각이 경험으로 이끌기도 하고, 경험이 생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현재의 경험이 미래의 생각으로 정리되고, 그 생각의 결과로 다시 움직이게 된다.
김영하 -『여행의 이유』中
내면, 정서, 생각을 100% 외부로 발화할 수 있었다면 우리가 수많게 겪는 불가해한 상황, 오해와 억측, 어긋남과 분쟁은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다. 내면은 발화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손실을 겪는다. 모두의 발화가 조금씩의 손실을 거친다고 생각하면 좀 더 너그럽게 상대를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나와 당신의 자아가 이야기의 꼴로 갖춰지기까지 기다려줄 수 있지 않을까.
이제 '모국어를 사용하면서 사는 것만으로 우리가 이미 어떤 가치 체계 속에 휘말려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내가 쓰는 언어에 대한 성찰이나 따뜻한 회의를 해볼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가치 체계를 넓히려는 시도로서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만큼 효과적인 것도 없을 테다. 번역가들은 타자로부터 나온 생각의 손실을 메우려 안간힘을 쓴다. 번역의 단어를 만나면 그 단어를 밝히고, 달구고, 녹이고, 섞어내고, 합금한다. 그 산통의 대가로 넓은 세계에 대한 넓은 품을 갖게 된다. 어쩌다 보니 매일 미루고 있는 언어 공부에 대한 동기 부여를 이렇게 받는다.
다시 돌아와 구조주의 언어학의 창시자인 '페르디낭 드 소쉬르(1872-1913)'와 대중문화와 언어의 해부학자 '롤랑 바르트(1915-1980)'의 사상을 접하면서 영화 '컨택트(Arrival, 2016)'가 덧입혀졌다. 언어가 지각·사고·시간 경험, 게다가 선택까지 재구성한다는 사피아 워프(Sapir–Whorf hypothesis) 가설을 기반으로 한 작품으로 엄밀하게 구조주의 언어학은 아니고 언어 결정론에 가깝지만, 연관 지어 상기하며 감상할 수 있는 아름다운 해설서라고 말하고 싶다.
인간의 언어는 좌측에서 우측으로 쓰이는 직선 형태이다. 시간 역시 과거, 현재, 미래 순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지구에 별안간 도달한 외계종족 헵타포드는 현재에서도 미래를 느낄 수 있는 고등생물이다. 그들의 언어는 원형이다. 원형은 시작과 끝이 없다. 그래서 시간의 개념과 인식도 선의 형태로 나뉘지 않고 한꺼번에 인식된다.
즉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느끼고 볼 수 있으며, 현재를 사는 동시에 아직 오지 않을 미래를 '경험'한다.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경험하는 구조를 갖는 삶은 어떨까, 그 종의 세계의 층위는 얼마나 넓고 깊을까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이런 능력을 가진 고등 외계생명체와 지구인이 조우하며 생길 파괴와 재앙, 약탈과 지배, 멸망 등의 클리셰적인 전개가 이뤄지지 않는다.
그들은 이 원형적 언어를 통해 시간을 통합적으로 인식하는 사고를 가졌고, 이 사고는 지배나 폭력이 아닌 올바른 용기를 가져왔다. 유대와 신뢰를 기반으로 한 인류와의 조응, 도움 요청이란 시도로 말이다.
통합적 사고란 이런 올바른 용기를 주는 걸까. 그 통합적 사고를 선물 받은 주인공도 결국엔 죽음이 예견되어 있을 미래를 낳기로 선택하는 것을 보면, 통합적 사고, 알아차림의 능력은 고통까지 수용하고 그 고통 속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온전한 용기를 부르는 게 맞다고 다시 한번 확인해 주는 듯싶다. 우리에게 미래를 볼 수 있는 언어를 선물할 헵타포드인은 없지만 대신 구조주의를 통한 언어의 한계와 알아차림을 얻고 '통합적 사고'란 자세를 스스로에게 받은 선물이라 생각하고 모두가 자주 들여다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렇게 다시, 불을 처음 쥔 인간을 기억해 자신의 무력(無力)을 극복하고 내면을 또렷이 응시할 차례다.
구조주의는 층위가 넓은 사상이다. 구조라는 측면이 가정, 학교, 직장, 집단이 모이는 모든 곳에서 자명하게 존재하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까지 규칙들로 엮여있기 때문이다.
1편에서는'나'를 이루는 가장 일상적이며 핵심점인 구조가 '언어'이기에 그 구조를 파악하는 데 많은 내용을 담았다.
앞서 나는 언어가 일종의 여과망이기 때문에 미처 말해지지 못한 감정이 잔재할 수밖에 없다 말했는데,
그렇다면 그 잔재물은 어디로 갔을까?
다음 편에서 나는, 그 언어가 담지 못한 잔재한 감정들에 대해 구조주의 정신분석 철학가인 자크 라캉의 언어를 빌려 비춰보려고 한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