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부르는 밤

제17화 │ 진수와 순옥의 흔적을 따라서

by seomar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날이었다. 윤서는 카페에서 맵고 진한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지도 한 장을 펼쳐봤다.
지도의 다른 점표 두 개. 그중 하나는 진수가 활동했던 인쇄소 옆 창고, 또 하나는 순옥이 격문을 전했던 철길변 골목이었다.
그 지점들에서, 이름 없는 사람들의 기억이 남아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윤서는 먼저 오래된 인쇄소 옆 창고로 향했다.
문은 잠겨 있었고, 담벼락엔 녹슨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그녀는 담을 올라가 안쪽을 들여다봤다.
창고 안엔 빈 기계 틈새, 먼지 쌓인 서랍, 그리고 잉크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진수… 여긴 네가 숨겼던 걸까?”
그녀가 속삭였다.

그때, 옆 골목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창고 주인이 나와 있었다.
“여기 왜 와요?”
주인은 불편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윤서는 천천히 말했다.
“여기 인쇄 조업하셨던 분… 진수란 분 이름이 노트에 있어요. 혹시 아시나요?”
주인은 잠시 침묵했다.
“옛날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다만… 그 창고는 말이 많았어요.
격문 찍고, 밤에 몰래 돌리고… 사람들은 그걸 ‘진수 동지 작업실’이라고 불렀지.”

윤서는 숨을 들이쉬었다.
그 말만으로도 충분했다.
기계와 잉크 틈새에서 꺼내야 할 이야기가 있었다.

다음으로 윤서는 지도에 표시된 철길변 골목으로 갔다.
그곳은 지금은 자전거 도로로 바뀌었고, 난간엔 그래피티와 오래된 안내판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여기서… 격문이 전해졌을까?”
윤서는 낮게 중얼거렸다.

한참을 걷다보니, 골목 끝에 나이 지긋한 여성이 화분을 들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이 골목의 옛 이야기를 좀 들어볼 수 있을까요?”
윤서가 물었다.

여성은 고개를 들고 미소 지었다.
“여기서 일했어요. 어릴 적이긴 하지만, 기억나요.
한 아이가 격문을 품고 철길 건너편으로 뛰었지요.
그 아이는… ‘순옥’이라는 이름이었답니다.”

윤서는 마음이 떨렸다.
“혹시 그 아이 기억 나시는 거예요?”
“얼굴은 안 보여요. 다만, 그 아이의 걸음만은 기억나지요.
너무도 빠르고, 격문을 품은 채 숨을 죽이며 가려던 걸요.”

윤서는 노트에 적었다.

순옥, 걸음의 그림자.
격문 품은 채 철길 넘어 간다.

저녁이 되자, 윤서는 다락방에서 사진과 노트를 펼쳤다.
진수 창고에서 찍은 잉크 자국, 순옥 증언 속 철길변 골목 사진.
그러나 마음 한편엔 무거운 물음이 있었다.
“이제 내가 묻고 있는 건… 기록뿐인가, 책임인가?”

그 질문 앞에서, 윤서는 키보드를 두드렸다.

이름을 부른 뒤에 오는 건 묻는 일이다.
진수 · 순옥, 너희가 걸어간 길을 묻는다.

무전기 상자 옆에서 아주 작게 소리가 났다.
윤서는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래, 이제 다음이야.”
그녀는 키보드 자판을 힘주어 눌렀다.

다음은 너희의 이야기를 쓰는 일이다.

그리고 창문을 열었다.
밤공기 속에서 들려오는 기차 소리, 먼지 섞인 바람, 오래된 철길의 울림.
그 울림은 옛날 격문을 품은 발걸음의 잔향처럼 윤서를 감쌌다.

윤서는 다시 지도 위로 시선을 옮겼다.
다음 지점이 기다리고 있었다.
발을 내딛자, 그 발걸음 위엔 수많은 이름들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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